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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2코린 4,7-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14 조회수1,544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2코린 4,7-15)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7)

 

앞선 코린토 후서 4장 1-6절에서 예수님만을 진실하게 증거한 사도로서의 기본 직분 수행 자세에 대해 피력한 바오로는, 이제 코린토 후서 4장 7절이하 15절에서 약함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목 자세 대해 설명한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이 보물(보배)' 이란 무엇을 지칭할까? 어떤 이는 코린토 후서 4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직분'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코린토 후서 4장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 값진 보물이 값싼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양자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이끌어 내고 있다.

질그릇 비유 로마서 9장 20-23절에서 바오로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피조물의 연약함을 효과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사야 29,16; 30,14; 45,9; 64,7; 예레18,6 ; 19,1-11;  애가 4,2; 욥기10,9 등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각각의 비유는 문제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나 강조점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질그릇 비유의 상징어는 그 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Manson은 바오로가 언급한 질그릇을 두고 '코린토의 잡화점들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값싸고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 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과 같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준다.

 

바오로는 질그릇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과 연약성을 설득력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Hughes는 이 비유를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코린토 후서 2장 14절이나 코린토 전서 4장 9절과 같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의 장대한 광경과 관련된 비유를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리한 견해는 아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에 있어서 금과 은을 질그릇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당시 관례였다.

 

B.C.167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Aemilius Paulus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은화를 담는 750개의 질그릇을 운반한 일이 있었다 (Plutarch).

이러한 사실로, 자신이 소유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이 자신의 연약한 육체에 담겨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자각한 바오로에 의해, 얼마든지 차용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그러한 사실은, 바오로의 복음 선교 활동이 연약한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지식의 빛을 받아 그것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자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높이 드러내실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깊이 아는 자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0)

 

코린토 전서 15장 31절에서 바오로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고 언급하며 시편 44장 23절의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라는 예언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요한 복음 15장 20절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라고 말씀하셔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고통에 필연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죽음을' 에 해당하는 '네크로신'(nekrosin)은 단순히 '죽음'(dying or death)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데,  본 단락에서는 고난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뿐 아니라 그때 수반된 죽음의 고통까지 말한다.

 

또한 '짊어지고 다닙니다'에 해당하는 '페리페론테스'(peripherontes)'지니고 돌아다니다' 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페로'(periphero) 현재 분사 능동태이다.

이것은 '항상'으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 always)란 표현과 더불어 바오로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항상 죽음의 고통을 지니고 다녔음을 말한다.

 

바오로는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6,17)하고 말한 것처럼 그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당했던 죽음의 고통에 날마다 동참하는 삶 살았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이처럼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한 데 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는 '히나(hina)가정법' 구문인 본문은 상반절에 나타난 바오로 사도의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즉 바오로가 날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죽음의 고통에 몸소 동참하고 있는 것'예수님의 생명' 을 그 몸에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님' 으로 번역된 '투 이에수'(tu Iesu)는 소유격으로서 바오로 자신의 생명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해 준 생명이며 예수님께 속한 생명임을 강조한다.

즉 '생명도'로 번역된 '헤 죠에'(he zoe)예수님의 죽으심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부활의 씨앗이 되었음을 함축한다.

 

또한 '드러나게'로 번역된 '파네로테'(phanerothe)'분명히 나타내다' 라는 의미를 지닌 '파네로오'(phaneroo)의 수동태이다. 여기서의 수동태는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필리3,10).

 

예수님께서 질그릇같이 연약한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고통을 담아냈듯이 그와 일치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현세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 고통의 길은 바오로가 진술했듯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죽음의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고통에의 동참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 이것이 무익한 인내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부활의 첫 열매를 쫓아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8년 6월 15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그림 같은 인생, 그림 같은 부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5,2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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