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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6.2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22 조회수2,033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6월 22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코린 12,1-10

형제 여러분,

1 이로울 것이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예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시와 계시까지 말하렵니다.
2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3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4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5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

6 내가 설사 자랑하고

싶어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그만두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7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태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성공이 쉬울까요?

실패가 쉬울까요?

 생각해보면 성공보다

실패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실패하려면 나쁜 습관들을

기르면 됩니다.

그리고 허송세월하면

 될 것입니다.

온갖 나쁜 습관으로 무장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뻔하지 않을까요?

충분히 실현될 수 있던 꿈들은

 사라지고, 원하지 않던 악몽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처럼 실패가 훨씬 더 쉬워

보이지만, 문득 학창시절에

담임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려집니다.
“빵점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맞을 수 있는 점수다.”
아무런 답도 표시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전혀 모른다고 해서

0점을 맞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학창시절 친구 중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다 찍었는데 열심히 풀었던

친구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면서 좋아했던 모습도

기억납니다. 어쩌면 실패는

성공을 아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은 곧 실패하는 사람이

성공의 가능성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의 실패에 자신을 절망,

좌절 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실패했을

때를 기억해서 성공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실패의

기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희망 안에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걱정 대신

 희망을 늘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이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재물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이고,

또 다른 욕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에 불안과 초조함으로 늘

걱정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세상의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참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가장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구입했던 그렇게

비싸지 않은 스테이플러입니다.

신학교 들어갔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이것만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을 뿐

다른 것들은 모두 버려지고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 것은 이렇듯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오래가지 않는 것이

 마치 영원을 약속한 것처럼 애지중지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희망을 잃지 않게 하면서 이 세상을

기쁘게 살도록 해주십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실천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준비를

하는데서 나온다.

(리트리히 본 회퍼)

(십자기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집중하십시오)


자신을 낮춘다는 것

작가에게 글은 자기 멋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를 자랑하는

장도 아닙니다.

독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작가의 글은 의미가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강론 역시

 신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설교학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강론은 쉽게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즉, 초등학생도

듣고 이해할 정도의 강론을

하라고 말하지요. 강론은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알리는 자리가 아니지요.

 또한 학술 발표 시간도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강론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일상

삶 안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주었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인간과의 관계가

중요했기 때문에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낮춰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삶,

이것이 바로 사랑이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으로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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