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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 (마태7,21-2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27 조회수1,875 추천수0 반대(0) 신고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

 

(마태7,21-29)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이 비유를 너무나 쉽게,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대조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자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자라는 것이지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 비유는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그런 비유가 아닙니다. 29절의 말씀만 보아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지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뒤 깜짝 놀라는데 놀라는 이유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같지 않아서 놀랍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율법지킴을 강조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는 율법학자들의 그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인간의 율법지킴과 행함에 관한 강조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비유를 잘 보시면 반석 위에도 멋진 집이 지어져 있고, 모래 위에도 멋진 집이 지어져 있다는 것이 이 비유 속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집의 외형으로만 본다면 어떤 기초 위에 지어진 집이 훌륭한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이 비유는 집의 외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초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초 위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인 것입니다.

 

21절로 올라가 보시면 주님께서 성도의 행함에 관해 언급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행함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이 아닌, 다른 행함에 관한 경고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주님의 심판의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읍소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 주님하고 부르며, 우리가 사는 동안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 했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하고 자신들이 행한 일들의 목록을 주님 앞에 제시했습니다. 22절에서의 행하다포이에오이고, 21절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다에서의 행하다포이에오입니다. 그 말은 22절의 악당들이 자신들의 행함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22절의 행함은 주님에 의해 부정당하고, 거절당합니다. 도대체 그들이 뭘 잘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잘못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준게 잘못인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여, 기적을 통해 연약한 이들을 도와준 게 잘못입니까? 이 모든 것이 전부 오늘날 교회가 열심을 부려가며 추구하며 행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 아닌가요? 그런데 왜 주님은 그들의 행함을 불법이라고 못을 박고 계시는 걸까요? 그건 그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6:38~40)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가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돕는다든지, 우리의 선한 행실로 아버지를 기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만을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납작 엎드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뜻입니다. 인간과 피조물의 창조된 목적이 뭡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사43:7) 7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

그런데 인간들은 하느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것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라고 금단의 열매로 규정을 하신 것은, 인간의 자기 가능성, 즉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를 애초부터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을 알도록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선악 판단의 주체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이라 인정하고, 하느님이 악이라 규정하신 것을 악으로 규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 말씀만 열심히 좇아 살면, 가장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 버렸습니다. 그 후로 인간은 선악 판단의 눈이 밝아져서 세상의 모든 사건과 현상과 현실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뜻은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 스스로가 선악 판단의 주체 자인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즉시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봉쇄해 버리셨습니다. 그 길은 절대,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는 들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노력이나 열심이나 정성으로도 따 먹을 수 없도록, 하늘의 조치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은, 자신들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그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폭로 당하지 않기 위하여 갖가지 방어기제를 내어 놓으며 스스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개척하려 시도를 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탑이라는 것을 쌓아서 인간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하려 하기도 했고, 카인의 후예들에서 시작된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을 사용해서 구원에 도달하려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 선함과 악함을 규정하여, 자신들이 선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을 많이 행하는 자들을, 착한 사람, 위대한 성자, 훌륭한 위인, 본받아야 할 사람 등의 이름으로 부르며, 마치 그렇게 사는 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을 하며 삽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들의 종교적 열심과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선함 등을 통하여 자신들이 꽤 괜찮은 자들인 것처럼 포장을 하여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선행체계와 지식체계, 문화와 문명, 그 모든 것들이 다, 타락한 인간들의 방어기제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이 꽤 기특한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시도와 노력의 어디에도 하느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정성과 열심의 주인은 항상 인간입니다. 생명나무 열매, 즉 영생으로 가는 길은 그룹들과 불칼로 막혀 있습니다.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 어떤 선행체계, 그 어떤 지식체계로도 그 길은 접근 불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스스로가 내린 선악의 판단을 기준으로, 그것을 행하고, 행하지 않고의 결과물을 가지고 천국을 침노하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선한 행위로도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로만 열립니다.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그 길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하늘 위로부터 땅 아래로 찢어진 것 기억하시지요? 그 휘장에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지 아세요? 바로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던 그룹들이 그 휘장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그룹들은 지성소, 즉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시은좌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생명나무입니다. 거기는 일 년에 한번, 완벽한 죄 씻음의 결례를 행한 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 외의 모든 접근 시도는 그룹들과 화염검에 의해 차단이 되고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 무시무시한 곳을 가리고 있던 그룹들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해산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나무로 가는 길로 들어가 영생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 이외의 모든 시도는 전부 죽음의 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주체가 되어버린 인간은 은혜를 이야기하면 자존심이 상해 화를 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되어버린 인간들은 절대 은혜 앞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혜에다가 자꾸 인간의 행함을 보태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과 제사를 열심히 지켰던 바리새인들의 저주받을 였습니다. 자신들의 열심과 정성과 노력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자기 영광 챙기기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내놓는 종교행위는 전부 자기의 자랑과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불의, 간음을 행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으며,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행함이 전부 자기의 의로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보다 연약한 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비판의 화살을 날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 세리와는 달라요그들은 말씀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고, 권능을 행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구제나 봉사나 섬김의 착한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을 서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을 반복하여 던지셨습니다. 그건 당시에 가장 더럽고 충격적인 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들의 행위에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독사 새끼들아라는 욕을 하셨겠습니까? 왜 그들의 그 착한 행위, 기특한 행위가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행위의 모든 목적이 다 자기 영광 챙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장으로 가서 인간의 행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마태 6:1~6)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의 영광 챙기기의 일환으로 행하는 모든 착한 일과 종교 행위가 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법을 행함인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마태7:23)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평생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고, 선행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었고, 그 행함을 의지하여 생명나무 열매에 도달해 보겠다는 무식한 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많은 행함을 장황히 나열을 하고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그들이 주여,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 이유는 자신들에게 주어질 권능과 사역 등에 의한 자기 영광 챙기기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애타게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더라도 모두 지옥행입니다. 그리고는 그 이야기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태7:24)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바로 위에서는 엉터리 행함을 내어놓은 자들에게 저주가 떨어지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행함을 내어 놓으라입니다. 그러면 그 행함은 어떤 행함이겠습니까? 도대체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고전10:4)

(고전3:10-11)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그 위에 집을 짓는 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집은 우리의 행함이나 열심, 노력, 정성 등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터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에 의해 지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터 위에, 예수의 집이 지어져야 하는데 거기에 우리의 엉뚱한 못질이 가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다 태우고 예수로만 구원하시는 것이 불 가운데서 주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만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반석 위에 짓는 집이라는 성도의 행함입니다.

 

오직 믿음 위에 서는 집, 예수 위에 서는 집, 예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공로 위에 지어진 집, 그게 진짜 믿음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이야기하면서도 어줍지 않은 행함이나 공로 들을 내어 놓으면서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신의 인기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음흉한 시도들이 교회 안에 여전히 팽배합니다. 그것들이 바로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겉으로는 근사합니다. 전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처럼 보입니다. 이 비유를 읽으시면서 누가 모래 위에 집을 짓겠는가?’하고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와디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디라는 곳은 평소의 건기에는 단단하고 견고해 보여 사람들이 교통로로 쓰기도 하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우기 때 비가 오게 되면 그 와디는 금방 본색을 드러내어 질퍽한 수렁으로 변하고, 심지어 그 와디를 길 삼아 물길이 잡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비가오고 창수(漲水)가 나면 그 와디는 물이 흐르는 물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 훌륭한 종교 행위와 감동스러운 착한 일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심판대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에 의해, 자기 영광 챙기기라는 더러운 외식으로 판정이 되는 그런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선한 행위와 열심 있는 종교 행위를 많이 내어 놓는 그런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야기 한다는 식의 성경 해석은 이 비유의 진의를 정면으로 거스리는 해석인 것입니다. 오히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더 훌륭해 보이고, 더 감동스러워 보이는 행함을 많이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전부 자신의 인기 챙기기, 자신의 만족 챙기기, 자신의 가치 챙기기, 자신의 자존심 챙기기, 자신의 영광 챙기기의 행함일 때, 그들은 그 행함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그 어떤 행함을 내어 놓을 때에도 오로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예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면목 없고, 공로 없는 겸손한 행함을 내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 있어서 반석 위에 짓는 집은 외려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보다 행함이 덜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를 잘 모르는 이들은 자신들의 행함으로 그 불안함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기 때문에 지나친 선행과 지나친 깨끗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의 더러운 좀비 얼굴이 가려지거든요.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스스로에게 폭로되는,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도덕과 윤리와 선행으로 감추어, 지저분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려는 시도, 그 모든 것이 다 추악한 인간들의 저주받을 방어기제들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선행과 그들의 종교행위는 모두 외식이었습니다. 자기 가치 챙기기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길 가운데에서 하고, 금식을 해도 수척한 척, 괴로운 척, 고통스러운 척을 했던 것입니다. 남을 도울 때도 나팔을 불며 했고, 헌금을 해도 남들 앞에서 폼 나게 했습니다. 그러한 선한 행위들이 모두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지옥으로 떨어질 불법을 행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우리의 선행이나, 봉사, 헌금을 한 번 돌아보자고요. 어떠세요? 그게 정말 자랑이나, 자존심 챙기기, 가치 챙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자신하실 수 있으세요? 만일 그렇다면 그게 다 장마(창수)가 나면 사라질 모래 위에 지은 집이고, 저주받을 불법일 텐데, 그것으로 눈물 흘리며 하느님 앞에 회개하신 적 있으십니까? 하느님께서 보고 싶은 눈물은 바로 그러한 눈물인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고, 이렇게 말씀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가치 챙기기와 나의 영광 챙기기, 나의 자존심 챙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법을 행함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일까? 정말 나에게는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하다이런 고백과 함께 내어 놓는 눈물, 하느님은 그 눈물을 보시길 원하십니다. 헌금을 하면서, 진정한 헌금을 하지 못하는 나를 폭로당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우쭐대는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 당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절대 그런 행위가 뿌듯하게 다가오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며, 그게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믿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의 항복,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박살을 내고, 자기 의로 겹겹이 둘려 있는 무장을 해제 시켜버리는 것이 올바른 설교자의 임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 인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부추겨 주는 설교를 하여 그들의 에너지와 소유와 열심을 노략질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위에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7:15~20)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15절을 보시면 거짓 예언자는 양의 옷을 입고 있으며, 거짓 예언자의 목적은 노략질입니다. 바로 이 거짓 예언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 주님을 외쳤던 예언자입니다. 그들이 모두 양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여러분, 박태선이나, 문선명 같은 사람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이리라는 것이 밝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양의 옷을 입은 이리는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말 옳아 보이고, 정말 깨끗해 보이며, 정말 정직해 보이는데, 실상은 양들을 노략질하고 있는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략질이라고 하니까 자꾸 돈을 목적으로 하여, 양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들을 떠 올리시는 것 같은데, 진짜 무서운 노략질은 양들의 소유를 갈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양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 예언자들은 어떻게 양들의 생명을 갉아먹는가?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고 경고를 하신 후에 갑자기 열매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열매를 말하는 것일까요? 구제의 열매? 청빈의 열매? 선한 삶이라는 열매? 그런 열매만 맺으면 진짜 예언자고, 그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짜 예언자인가요? 그럼 간디는 선한 예언자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슈바이처는 어때요? 법정스님, 성철스님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예언자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는 세상 사람들은 내어 놓을 수 없는 특별한 열매입니다. 그게 뭘까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믿음입니다. 그게 열매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 긍정을 부인해 버리는 대전제를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신뢰하는데 왜 다른 존재를 믿습니까? 믿음은 나라는 존재를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에 의해 자기가 부인이 되고, 성령에 의해 그들 속에 맺혀지는 것이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그 열매를 이렇게 세분하여 기술을 합니다.

(갈라5:22~23)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 안에 이러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나요? 자신 없으시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는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입니다.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는 예수를 믿는 순간 즉시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 그 때 완전한 열매로 우리 안에 자리를 잡게 되는 열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내가 나의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선악의 원리에 입각하여 맺어 놓은 가짜 열매들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익어가고 완성되어져 가는 그 길에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 자랑으로 내놓는 선한 행위들의 소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잎사귀만 무성한 외식의 행위들이 은혜의 복음 앞에서 스러져 가고, 그렇게 자신의 의가 부인이 되어져가게 되면 성령이 맺으시는 진짜 열매가 보이지 않게 익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진짜 열매를 맺는 모습은 외부로 드러나는 선한 열심과 부지런한 종교 행위의 감추어짐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은혜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은혜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골수와 관절을 쪼개 버립니다. 가짜 열매, 가짜 행위들을 완전히 폭로시켜 버리고, 포를 떠내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착함이나 열심 등이 감추어지고, 숨어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진짜 행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모습은 삼자의 눈에 시험이 든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열심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첫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보여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그 은혜와 자비 앞에서의 처절한 자기부인을 가르치지 않고,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며, 긍정적 사고니 뭐니 하면서 열심과 충성과 봉사를 강요하는 그런 자들이 바로 양의 탈을 쓴 거짓 예언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강조합니다. 착하게 살자고, 선하게 살자고 눈물 섞인 호소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열심과 선함의 결과는 항상 인간의 유익으로 결론지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성공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위해, 우리가 열매를 맺자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 같지요? 건강한 설교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생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주님께서 열매를 맺는 주체가 누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요한15:4-5)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보세요.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일한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은 나쁜 나무일뿐이라는 처절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로마11:24) 24 그대가 본래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래와 달리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의 그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악의 현실과 그 죄악을 덮는 은혜의 현실을 외면한 채, 온통 가시나무와 엉겅퀴뿐인 저주받은 인생 속에 포도와 무화과를 내라는 억지 강요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자신들의 세상 복과,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도에 지나는 헌금과, 도에 지나는 봉사와, 도에 지나는 종교 행위를 내어 놓고는 주님, 주님, 제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권능도 행했습니다하고 자기 의의 마일리지를 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도 모른 채, 거짓 예언자들에게 자신들의 재산과 힘과 노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노략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가시와 엉겅퀴가 어찌 좋은 열매를 맺겠느냐?’ 그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아담 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받은 존재들입니다. 한 마디로 나쁜 나무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쁜 나무인 자신의 본전을 보지 못하고, 격에 맞지 않게 좋은 나무 운운하고 있냐는 질책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고, 나쁜 나무됨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행하는 자들이 내놓는 모든 열매가, 겉으로는 좋은 열매인 것처럼 보이고, 단단한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보이지만, 그 착한 행실들이 사실은 나쁜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느님의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에 대해 충분한 이해도 없는 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멋진 평판을 얻어내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너도 나도 착한 일에, 경건한 종교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전부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금방 물 천지가 되는 와디인 것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 바로 위에서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의 비유도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마태7:13~14)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여기에 드디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이 나옵니다. 그 길은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입니다.

(창세3:24)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바로 이 길입니다. 말이 좁은 길이지, 엄밀히 말하면 아예 아무도 못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좁은 길 끝에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이 말씀을 육신의 편안함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기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을 받고 잘살려는 의도로 하느님을 찾는 것을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섬김의 신앙을 육적인 고난의 신앙이라 하여 좁은 길, 좁은 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이 산상 수훈의 문맥 속에서 그 정도의 추론은 너무 가난한 해석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들은 전부 자신의 영광 챙기기로 일생을 올인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영광 챙기기를 위해서는 손해도 감수하고, 상함도 감수 하고, 심지어 목숨도 내어 놓습니다. 그게 죄의 무서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자랑과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고, 수도원에 올라가 금욕 생활을 하기도 하고, 순교도 불사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어느 날 할복을 하고, 투신을 하고, 분신을 하는 것을 보면 참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게 다 인간들의 가치 챙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가치 챙기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불사합니다.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신이 되어버린 인간들은 그렇게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라는 본성에 의해 남에게 인정받는 착한 일, 선한 일, 종교적인 일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전부 자기 자신입니다. 그게 세상적 성공과 세상적 부의 축재, 세상 적 번영 일수도 있고, 남들의 평가, 혹은 자기만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자기가 너무 대견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저주 받을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를 안 믿고도 착한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영광 챙기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예수를 믿지 않았던 간디 같은 사람이 좁은 문, 좁은 길을 갔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 금욕과 선행과 섬김으로 고생이 되는 삶을 살다가 가긴 했지만 넓은 길을 간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만족, 자기 자랑, 자기 영광을 위해 고생도 마다 않고 열심히 가는 그들이 가는 길을 전부 넓은 길, 넓은 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좁은 문은 어떤 사람이며, 좁은 길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자기의 자신감, 자존심, 자신의 능력, 열심을 모두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바라며, 그 분 앞에 납작 엎드리는 그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아무나 못 갑니다. 자기를 해체하고, 자기를 부인해 버리는 길이기 때문에 아무나 못갑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만 믿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0:7)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보세요. 예수가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에요. 그래서 예수의 은혜를 모르고는 절대 그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따라서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는 이들은 반드시 예수의 은혜와 예수의 자비 앞에서 자신의 티끌 됨을 먼저 인정해야 돼요. 뿐만 아니라 그 예수라는 좁은 문은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못 들어갑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편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루카13:24)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좁은 문, 좁은 길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티끌 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가는 길이며 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풍성한 행위를 내어 놓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착한 행위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게 진정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인지 자신의 영광을 위한 행위인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며 갑니다. 그리고 혹시 그러한 행위가 자신에게서 나온다 할지라도 그게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사시는 예수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절대 자기 의의 마일리지로 쌓아두지도 않습니다.

그냥 늘 감사하고, 부끄럽고, 면목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세상적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굉장히 넓은 길로 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부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되는 일은 자꾸 감추게 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일은 자꾸 숨기게 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하고, 선한 일을 힘쓰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생명의 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막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막아 놓으셨어요. 그 길은 인간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못 가는 길이에요. 오직 예수의 은혜만 의지해야 돼요. 그 예수를 아십니까? 그 예수의 은혜를 아십니까? 그 예수 앞에서의 나의 추악함을 인정하세요? 나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도 하느님 앞에서 더러운 걸레(이사64:6)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하느님의 만을 겸손히 받아들이십니까? 그러면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맞습니다. 그 문은 좁은 문이 맞아요.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여러분이 참 예언자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고, 그런 여러분이야말로 지금 열심히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전히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존재로 부각이 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고, 열심히 자기 자존심 챙기기와 자기 구원 챙기기, 자기 천국 챙기기, 자기 영광 챙기기의 일환으로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봉사도 하고, 순교도 하는 그 사람들, 그들이 넓은 문으로 가는 자들이고, 거짓 예언자들이며, 모래 위에 겉만 번드르르한 집을 짓고 있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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