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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드로 사도 축일을 맞이하여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29 조회수1,510 추천수0 반대(0) 신고

 

 

베드로 사도는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말입니다. 이 세상 죽음의 그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어부로 말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하느님의 계획 속에 어부인 사람을 수석 제자로 삼으려고 미리 계획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어부가 베드로 사도 한 사람만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어부들 가운데 하필이면 베드로 사도를 최고 으뜸 사제로 선택을 하셨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건 하느님만, 예수님만 아실 일입니다.

 

저는 이 의문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수석 제자로 삼으려고 생각하신 시점은 언제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까 아니면 공생활을 하시면서 제자로 삼을 만한 사람을 물색해서 그 중에서 제일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사람 중에서 최종적으로 선택을 하셨을까를 나누어서 생각해본다면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저는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 있지 않았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만 제가 생각한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만약에 지상에서 공생활을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최종적으로 낙점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완수하고 예수님께서 지상을 떠나실 때 예수님을 대신해 지상에서 크나큰 일을 맡겨야 할 사람을 선택을 하는 중대한 일을 섣불리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봅니다.

 

물론 하느님의 근본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 실수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시더라도 엄청난 계획 속에 베드로 사도가 있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일을 대신해서 일을 할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 능력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게 어쩜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부족한 어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당시 신분으로 봐서는 어부의 신분은 최하위 신분이였지 않나 싶습니다. 신분이 낮다고 해서 무능하다고만은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근데 재미나는 것은 제가 지금까지 베드로 사도에 관한 설교나 강론을 통틀어서 봐도 베드로 사도가 똑똑하다고 하는 내용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아마도 추측일 겁니다. 신분이 하층 신분이다 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사실 하나만 봐도 하느님의 계획 속에 베드로 사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단서가 된다고 봅니다. 원래 하느님께서는 약함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성경의 내용을 유추해보면 그렇습니다. 그당시에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유능한 사람을 얼마든지 뽑을 수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사람을 뽑아 세우셔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단순한 능력적인 면에서 생각해봤습니다. 이젠 성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 사도의 성격은 불같은 성격이면서 단순합니다. 우리는 단순하다고 말하면 조금은 아둔하다고 생각을 하는 게 보편적인 생각이지 않습니까?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요. 물론 이런 면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지만 다르게 본다면 너무나도 단순하기 때문에 으뜸 사도가 될 수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단순한 사람이 하느님 일을 하게 될 때 옆도 보지 않고 그 길이 맞다고 판단하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그 길만 생각하고 쭉 어떤 일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있다고 봅니다. 자칫 잘못하면 왜골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그런 걸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니 공생활 동안 충분히 그런 길을 가지 않도록 단련시켰을 거라고 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런 면도 고려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을 선택하신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전 베드로 사도의 성격 중에 뿔뚝 성질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약한 것과는 다른 마음이 여린 면도 있다고 봅니다. 나약한 것과 여린 것과는 사전적인 의미는 거의 유사하지만 사실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심성 깊은 가운데를 보면은 착한 면이 있습니다.

 


아마도 마음이 여린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해도 단심을 바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좋은 제자가 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일을 대신해서 해야 하는 사람을 선택하려고 할 때 끝까지 변함없이 일편단심으로 예수님을 따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셨을 거라고 봅니다.  이런 조건의 제자가 되려면 아마도 단순하면서도 여린 성격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성격으로만 유지한다면 엄청 부족할 겁니다. 이런 조건은 항상 흔들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어떻게 단련시키고 만드셨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철저히 자신의 능력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인지하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밤새토록 고기가 잡히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질을 하라고 하셨을 때를 한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면 아무리 자신이 부족하지만 고기 잡는 것만은 그래도 베테랑이라고 마음 속에는 자부할 텐데 아무리 스승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몰라서 스승인 예수님 말씀대로 해보니 자신이 생각한 거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은 걸 봐서 분명히 베드로 사도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래도 내가 이 바닥에서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기만 잡은 사람이 아닌가 하면서 말입니다. 원래는 갈릴리 호수 바다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평생 어부의 직업을 가진 베드로 사도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접고 스승의 말씀대로 따르니 정말 자신이 생각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니 분명 속으로는 놀랐을 겁니다. 이때 이분은 보통 범상치 않은 분이시다는 것을요. 어쩌면 이분은 고기떼가 다니는 길도 아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부였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어부가 아니였음에도 물길을 아시는 걸로 봐서는 충분히 사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이때 아마 사도는 깨달았을 겁니다.

 

이 스승님은 단순히 보통 스승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해서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꺽을 수 있도록 사도를 호되게 훈련시켰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이런 와중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해나갔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고민을 하셨을 겁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를 어떻게 하면 흔들리지 않는 반석처럼 만들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바로 베드로 사도의 여린 심성으로 반전을 도모하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약한 한 인간을 위대한 사도로 만들게 되는 계기가 바로 나약한 한 인간의 눈물이지 않았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평상시 베드로 사도를 보면은 자신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절대 배신을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사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도의 마음도 인간적으로 철저히 부수어버리면서 철저히 사도 속에 있는 이런 교만한 마음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이것 또한 인간의 호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알려주시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번 해봅니다. 바로 그건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베드로 사도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걸 드러낼 때 예수님께서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배신할 거라고 말씀하신 대목을 보면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예수님을 배신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이때까지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진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거라고 생각을 하니 인간적으로 겁이 덜컹 났던 것입니다. 막상 겁이 나다 보니 이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도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근데 세 번째는 달랐습니다. 세 번째 부인했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이 세 번 부인할 거라는 말씀을 말입니다. 그때 바로 베드로 사도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토록 자신이 절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따르겠다고 한 맹세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제자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겁니다. 후회의 마음이 밀려들면서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을 겁니다.

 

이때 사도는 스승이 남긴 말씀을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한 사실에 슬피 울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음이 모질었던 사도였다면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모른 체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못난 자신을 그래도 제자랍시고 제자로 삼아주시며 대해 주시고 사랑도 주시며 애정을 쏟아주신 사랑을 생각해봤을 때 인간적으로 스승을 배반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비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이때 사도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난 이제 제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도 이렇게 스승을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말 예수님을 뵐 면목이 없다. 쥐구멍이도 있으면 숨고 싶은 기분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이 잘못을 만회할 수가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를 그토록 아껴주고 믿어주신 스승을 배반했는데 이 실수를 만회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죽음으로써 스승님께 용서를 청하는 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세상의 관점에서 말하는 죽음이 아닐 겁니다. 물리적인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은 이미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과도 같은 처지라고 생각해서 구차하게 사느니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 동안 정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길만이 자신의 과오에 대해 스승인 예수님께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을 했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베드로 사도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도 일생을 살면서 한 번은 베드로 사도가 흘린 눈물처럼 이런 눈물을 진심으로 흘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아니 뭐 내가 예수님을 배신한 적도 없는데 왜 이런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하는 그런 거와는 다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는 눈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알든 모르든 세례 때 맹세를 하고 또 매년 한 번씩 세례 갱신 서약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고 맹세를 하면서도 실은 그런 맹세는 한낱 공허한 맹세로 끝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 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그 맹세의 유통기간이 짧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이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철저히 잘 따르겠다고 맹세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한 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사도는 명시적으로 부인을 했을 뿐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고 맹세한 서약을 묵시적으로 지키지 않았다는 차이밖에 없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위대한 베드로 사도 한 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위대한 사도처럼 우리 자신 모두도 그런 사도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가 베드로 사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일 겁니다. 우리도 베드로 사도의 축일을 맞아 성인의 삶을 되돌아보며 신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진정으로 2000년 전에 베드로 사도께서 흘린 눈물을 한 번 묵상하며 다시 자신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다지는 의미를 만들어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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