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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7.0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04 조회수2,443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9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 22,1-19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복음 마태 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서울대 암연구소에서는

스트레스가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용 쥐를 활용한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바닥에 전기

충격 장치가 포함된 투명한

유리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 후 한 집단에는 일정 시간마다

고통을 유발하는 전기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맞은 편 쥐들을 관찰할 수

있게 배치했습니다.
하루 종일 전기 충격을 받았던 쥐와

오로지 유리창 너머로 고통 받는

동료 쥐를 관찰하던 쥐들의 스트레스는

과연 어떠할지를 살폈습니다.

16시간의 실험 끝에 탈진한 쥐가

나왔습니다. 어떤 쥐들이 탈진했을까요?

 하루 종일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탈진했을 것

같지만, 뜻밖에도 관찰 조건에

 있는 쥐들이었습니다.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속에서 힘들어할 것 같지만,

사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의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것을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이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통 속에 있다고 자기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사람도 고통을

 줄이는데 함께 노력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찾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서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나 그 옆에서

고통을 보면서 함께 해주는 사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이라면서 불쾌하게 생각하지요.

그들은 고통 받고 있는 중풍 병자와

함께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중풍 병자의 고통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입니다. 이는 그만큼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더욱 더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그들의

고통이 치유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격려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켄 블랜차드)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그냥 버리세요...

어떤 책에서 집단의 힘이

개인의 힘보다 우선시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래서 소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서 개인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긴 서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다고

서로 원수처럼 대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과정 안에서

타인과 비교하고 또 비교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타인이 기준에 서게 될 때,

남 눈치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각 개인이 바로 서야 우리 모두도

함께 잘 살 수가 있게 됩니다.
만약 세상에 딱 한 가지 색깔만

있다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보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각각의

다양성이 있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색깔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들 안에서도

다양함이 있어야 지극히 정상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판단에 대해

의기소침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는 이런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내게 쓰레기를 주고서는

차를 타고서 재빨리 도망을 칩니다.

이때 쓰레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쓰레기를 하나하나 꺼내서

분석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럴수록

 화가 날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끝입니다. 남의 말이

 쓰레기라고 생각되면 그냥 버리십시오.

분석하지 마세요.

(제가 사는 강화의 군청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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