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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부활은 진화한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04 조회수1,430 추천수0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부활은 진화한다

찬미예수님.

부활 또 축하드립니다. 부활하셨어요?

부활 후 복음사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제일 중심은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다.

부활의 실제성입니다.

예수님은 환상이나 환각, 혹은 단순히

영적인 현상이 아니라 손바닥에

구멍이 나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인간 예수님의 부활을 복음사가들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여러 사람 앞에 나타났지만,

바로 알아봅니까?

, 그러면 과연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보게 막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이게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제일 먼저 성서에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동산지기인 줄 압니다.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막은 막달라

마리아의 어두움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자기 위주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눈물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죽은 이가 하느님과 만나는 영광스러운

바로 그 순간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잃어버렸다고 하는 슬픔이 눈을 가리기에

예수님이 앞에 서 계셔도 못 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못 본

두 번째 어두움은 방향성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을 향해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어둠의 상징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무덤에 안계신데,

막달라 마리아의 몸과 마음은

빈 무덤을 향해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늘 예수님과 등을 지고 산다면,

죽을 때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무려 삼십 리 길을

걸어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인줄 몰랐다.’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의 눈을 가리게 했던 것의

정체는 절망감입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못 알아봅니다.

그 절망감 안에는 분노도 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쫓아다녔는데, 이게 뭐야?

한자리할 줄 알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

엠마오가 그들의 고향인지

성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두 제자는 절망감으로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덮여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삼십 리 길이면 무려

세 시간 이상을 예수님이 옆에서

갔는데도 불구하고 모릅니다.

그리고 서서히 알게 되죠.

말씀하실 때에 우리 스승님처럼 하신다,

그래도 확실하게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그런데 빵을 떼어 주실 때에

그때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았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임을 알고

즉시 삼십 리 길을 거꾸로 되돌아가서

주님 부활하셨습니다.’하고 외치는 모습은,

우리들이 미사에 와서 말씀을 들으며

서서히 눈이 열리고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과 하나 되고 파견때

천주께 감사합니다.’

외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성당 들어올 때 얼굴과 나갈 때

얼굴이 달라야 합니다.

성당 들어올 때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감, 눈물이 앞을 가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일주일 동안

살았다 하더라도, 나갈 때는

그 어두움은 벗겨져야 됩니다.

세 번째로 도마 사도가 부활한

예수님을 못 본 첫째 이유는

교회를 떠났던 겁니다.

유다스는 자살을 했기에

열한 제자가 남아있었는데,

그중 토마스는 다락방을 벗어났습니다.

? 먹고 살길을 찾으러 다닌 겁니다.

혹시라도 다락방에 있다가

로마 병정들이 쫓아와 어리석은

죽음을 당하기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주님의

첫 번째 부활을 못 봅니다.

도마 사도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열 제자가 어디 갔다 이제 와.

우리는 주님을 뵈었어.’

도마 사도가 믿었습니까,

못 믿었습니까? 못자국과 창 자국을

눈으로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합니다.

여드레 후에 도마 사도가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 도마야. 집어넣어 봐.’

도마 사도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미쳤습니다,’

그렇게 안 했죠.

딱 두 마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2천 년 동안 의심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도마 사도지만,

도마 사도의 장점은 확신에 이르기 위한

성실한 의심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얼치기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닌 확신에

이르기 위한 성실한 회의 속에 믿음의

결정체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도마 사도는 인도에서 전교하다

원주민들의 창에 찔려 순교하십니다.

그러나 도마 사도는 첫 부활을

못 본 어두움은 기본적으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나친 이성주의자였습니다.

또 합리주의자였고 또 회의론자였습니다.

도마 사도는 시간이 늦더라도

언젠가는 만나는데, 뜨겁게

또 빨리 만나지를 못합니다.

짐승과 달리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의 선물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가능한 정삼각형을

이루도록 우리들은 스스로

잘 분별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 머리로만

하느님을 알려고 합니다.

좋은 책을 다 보고 외워도

그저 교리적인 하느님만 알지

살아계신 하느님을 모르고 죽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너무 감성적으로

하느님만을 믿습니다.

양은냄비처럼 열심히 할 때는

물불 안 가리는데 슬럼프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지는 있는데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일 미사만 열심히 나오면 돼.’

생전 성경책 읽어보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하여, 하느님에 대한

느낌보다는 그냥 믿는 거야.’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락방에 없었던 도마 사도는

지금 얘기한 대로 첫 번째 교회를

벗어났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교회가 실망스럽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은 교회를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보고 사제와 수녀들을 보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수백 번

냉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 한가운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리 잡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인간들한테 휘둘림을 안 당합니다.

툭 하고 던지는 그 말에 물론 상처는

받아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는

회복이 빠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안 씁니다. ?

서로가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는 신의, 신뢰라고

하는 단어만 존재합니다.

사람 사이 신의의 다리는

기도를 통해 분별이라고 하는

나사로 잘 조여져 있어야 됩니다.

이 분별의 나사가 풀어질 때는

사람 사이의 신의의 다리는 무너집니다.

어떤 때는 내가 분별이 부족하여

상대편을 죄짓게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지혜롭고 옳은 판단을

한다면 저 사람이 저렇게

나를 속이려 들지 않았을 텐데.

어떤 때는 내가 등신 같아서

상대편을 죄짓게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배짱이 생깁니다. 담대해집니다.

사람한테 휘둘림을 당하지 않고

환경에 휘둘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담고 살면 수수깡보다

더 가벼운 십자가라 하더라도

그 무게에 못 일어납니다.

며칠 전 평일 복음에 티베리아 호숫가에

제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이제 다시 어부 짓 해야지.’, 하며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힙니다.

그때 예수님이 100미터 정도 떨어진

뭍의 언덕에 서셔서 오른쪽으로

그물 던져라.’ 그랬죠.

왜 오른쪽입니까?

높은 데서 보면 고기떼가 움직이는 것이

잘 보이기에 오른쪽이죠.

물론 구약성서에는 오른쪽은 선이고,

왼쪽은 악으로 나옵니다.

그런 성서 해석도 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예수님의 하셨던 얘기를

곱씹어 봐야 하는데.

나는 죽었다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수도 없이

얘기했지만, 티베리아 호숫가의

제자들은 숙명론자가 돼 버립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3년 동안

허송세월 보냈구나. 다시 고기나 잡자.

풀칠이나 하고 살아야지.’

주저앉은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뭍 가에 숯불을

피워놓고 고기 좀 가져 오너라.’

그때 고기가 153마리가 잡혔다.

왜 복음사가는 그 숫자를

153마리라고 했을까?

100은 완전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을 교회 안에

품는다는 뜻입니다.

50은 이스라엘의 큰 부족은

12부족 이지만 작은 부족들까지

합치면 50이 됩니다.

50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3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뜻합니다.

그물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

이 세상의 모든 민족, 유대인들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이끄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의 제일 끝은 누가 잡아서

끌어올렸습니까? 베드로 사도입니다.

으뜸 사도로서 우리들을 1대 교황으로서

주님께로 이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못 봤던

이유는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한 번도 아닌

세 번 배반했던 깊은 상처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 상처 때문에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도 제일 맏이라고 나를 믿었던

스승님 면전에서 저 사람 모르오.’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도

혼내지 않으셨죠.

베드로 사도는 그 깊은 상처가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흩어지려고 하는 아우들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못 쳐다보고 땅을 보고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쳐라.’

또 다시 묻죠, 몇 번?

세 번 묻습니다.

세 번의 그 배반을 세 번의 고백을

통하여 치유시키십니다.

그리고 너는 반석이다.

내 교회를 다스려라.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이런

어두움들이 숨어 있다면

죽을 때까지 부활하지 못할 겁니다.

부활은 한마디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늘 현재

진행형인 숙제입니다.

부활은 영적 진화를 뜻합니다.

죽을 때까지 커 나가야 됩니다.

멈춰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눈을 뜨면 바로 그날이

부활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해야 되고,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여,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쓰실 때가

있구나. 다시 나가서 열심히 살자.’

너무너무 부족한 나지만 내 뒤에

성령이 함께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부활입니다.

일본에는 유명한 정원이 많은데,

한 정원에 조그맣게 생긴 나무들이

바닥에 펼쳐있었습니다.

마침 그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를

만나보니, 그 작은 나무를 뽑아

뿌리 끝을 잘라주는 것이었습니다.

키가 안 자라게 하기 위해서 자른대요.

만일에 그 사람이라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커야 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높이 올라가야 됩니다.

해마다 키가 커져야 됩니다.

영원히 하느님을 향하여

올라가야 됩니다.

언제까지 땅바닥에 붙어있는

난쟁이 나무처럼 살아갈 것인가!

이미 죽을 때가 되면

천국 문 앞에 가 있어야 됩니다.

영이 커져서 천국 문 앞에

이미 가 있어야 됩니다.

부활은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셨고,

부활한 후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다락방의 도마 사도, 티베리아 호숫가의

제자들, 베드로 사도 -

이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그 어두움은

우리들에게도 같이 공존합니다.

이 어둠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갖고 있던 상처였구나.

이 어둠이 바로 도마 사도의

어둠이었구나.

과감하게 주님께 부활 찬송을 부르면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합시다. 아멘.

2019년 부활 제2주일(04/28)

(서운동성당)

-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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