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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7.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09 조회수2,321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창세 32,23-33

그 무렵 야곱은 밤에

23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건널목을 건넜다.

24 야곱은 이렇게 그들을

이끌어 내를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26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그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묻자,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30 야곱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하고 여쭈었지만,

그는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하고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복을 내려 주었다.
31 야곱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프니엘이라 하였다.

 32 야곱이 프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의 위로 떠올랐다.

그는 엉덩이뼈 때문에 절뚝거렸다.
33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짐승의 엉덩이뼈에

 있는 허벅지 힘줄을 먹지 않는다.

그분께서 야곱의 허벅지 힘줄이

있는 엉덩이뼈를 치셨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전에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몸은 잠시 빌린 것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빌린 몸 안에 이런 성격을

가진 내가 있을 뿐입니다.
내 것이라고 한다면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다보니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뜻밖의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내 몸이 또 내 생각이

따르지 않아서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때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면서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빌린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이해가 됩니다.
솔직히 빌린 물건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렌터카를 생각해보십시오.

렌터카를 타면서 평소에 타던

내 차와 다르다고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빌린 차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우리 몸 역시 주님께서 잠시

 빌려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빌렸다고 해서

 막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렌터카가 내 차가 아니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조심하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만약 차에 상처라도 낸다면 배상을

해줘야 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몸 역시

주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면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막 사용해도 될까요? 다시 되돌려

드릴 그 때를 대비해서 잘 사용하고,

삶의 마지막 날에 주님과 셈을

하게 될 때 자랑스럽게 주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빌려준 것에 대한

어떤 비용을 청구합니다.

래서 귀한 것일수록 빌리는

가격은 더욱 더 높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빌려 주시면서도 아무것도

청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의 뜻에 맞게 살아갈 것을,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꾼이 많아지도록

청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꾼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성직자, 수도자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되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몸을 최대로 활용하는 사람,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스스로가 그러한 내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굳게 믿고 노력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당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더 높은 곳을 열망하면

당신은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브라이언 트레이시)

(수확할 것은 많지만 일꾼은 적습니다)


변신

번데기가 애벌레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해야

온전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변신하는 과정이 있고,

실제로 변신을 해야 온전히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인간이 아기로만

살고 있다면 어떨까요?

또 어린이로만 살고 있다면,

청소년과 청년으로만 살고 있다면?

물론 보호를 받는 유아,

청소년기에만 머물렀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시기를 거쳐 즉, 변신의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어야만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또 한 번의 변신 기회가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게

된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모님께

청하면서 그 그늘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다는

이유만을 계속 만들어서 변신의

기회를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인간, 참으로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어떤 변화든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피하는 사람은

지금의 모습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확할 일꾼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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