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7.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5 조회수1,993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9년 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탈출 1,8-14.22

그 무렵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복음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피곤함이 가득할 때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디 가서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휴가에 대한 생각은

더욱 더 커지면서 이번 휴가 때에

무엇을 할지 그리고 휴가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다녀왔던

휴가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가기 전의 예상이 다녀온 후에도

그대로 맞아 떨어지던가요?

아마 “집 나가면 고생이야.

그냥 집이 최고야.”라는 말씀들을

제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휴가를 통해 지친 몸을 풀고 싶지만,

사실 휴가를 통해서 더욱 더 지쳐서

오게 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지친 몸을 풀기 위해서라면 휴가가

 아니라 잠을 자거나 목욕탕에

 가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휴가는 이제까지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험을 통해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쉬는 시간,

잠자는 시간, 남들 다니는 곳을

그냥 쫓아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할지가 더욱 더

분명해집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동원되고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히 생각하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그 안에 담긴 또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매 순간이

새롭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비자들에게 왜 신앙생활을

가지려고 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이 ‘행복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자마자 곧바로

행복이 오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때에 비로소 참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도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셨고,

부활하신 뒤에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면서

 평화를 빌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막연한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순간의

 만족을 위한 것, 세상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평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평화를 추구하십니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부르제)

(성 보나벤투라 주교)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

우리의 뇌는 다음의 단계를

거쳐서 정보를 처리합니다.

먼저 오감의 단계로 자극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제 선택된 정보를 이제 판단하기

좋도록 묶거나 배열하는 조직화

단계로 넘어갑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정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뇌는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일을 해야 하는

선택의 단계부터는 게으름을 피워서

우리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하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지 않습니까?

아니 내 자신도 그런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서 주변에서

말할 때에는 당황스럽게 됩니다.

바로 게으른 뇌가 복잡하기 때문에

기억에 남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뇌가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오감의 단계에만 머무르겠습니까?

아닙니다. 선택의 단계에서 뒤로

미루지 않는다면, 또한 남들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려고

한다면 맨 마지막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단계가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선택을 늘 뒤로

미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남들이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실천이 힘든 이유는

내 뇌에서 복잡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루지 않고, 내 자신이

지금 해야 할 것임을 기억하고

실천한다면 뇌는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이렇게 사랑만 잘 해도

머리가 좋아집니다.

(평화와 사랑의 성지 루르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