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법 준수보다 사랑 실천이 더 우선 / 연중 제 15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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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9-07-19 | 조회수1,46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법과 규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마치 교통 신호가 질서를 만들어 보행자와 차들의 통행을 더욱 원활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구급차가 빨간 신호등이 켜져도 교차로를 건너갈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법은 모든 것에 분명히 앞선다. 사회도 사람도 여유 없이 형식에만 매달린다면 껍데기만 남는다. 그런 사회에는 사랑이 머물 자리가 별로 없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 당시 율법학자들의 해석으로는 유다인들은 안식일에는 추수를 하면 안 되는데, 밀밭을 지나가다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그 행위 자체가 추수에 해당된단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시비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이삭 몇 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본다니 좀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만큼 그들은 ‘경직’되어 있었다. 우리네 사회에서도 여러 규정들이 많은 이를 얽어매고 있다. 이 같은 일들이 이천 년 전 유다인들에게만 발생하는 게 결코 아니다. 금요일에 단식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목요일에 남은 음식을 모조리 버렸다고 가정하자. 집 안에 음식이 없기에 단식은 잘 지킬 수 있을지라도, 그 숨은 진정한 의미는 과연 어디서 찾을까? 율법에만 파고들면 그렇게 될 게다. 숲은 못 보고, 나무만 보기 시작한 꼴이 되니까.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만이 지키는 것으로도 착각도 할게다. 자동차가 차선을 벗어나거나 전철이 레일을 벗어나면 결코 달릴 수가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희생 재물이 아닌, 자비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꼭 헤아리도록 우리를 훈계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정녕 무엇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창조된 목적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일러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법은 사람 사이를 규정하고, 율법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한다. 법이 우리에게 무섭게 느껴지고 두려움을 줄 때도 있으나, 결국은 사람을 보호하고,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도록 존재한다. 그러나 법을 자신의 이기심 충족의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를 위협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생활을 해치는 무서운 도구가 될 수도. 그리고 그것으로 나와 자신과 관계된 이만을 추구하려한다면 그건 정말 ‘오늘의 바리사이’와 다를 바가. 사랑은 물이나 바람과 같아서 늘 어디론가 흘러야만 할 게다. 어떤 틀에만 갇힌다면, 사랑은 그 본질을 잃고 마니까. ‘사랑’은 모든 법의 근본정신이기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안식일의 핵심은 희생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이며, 당신을 통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선포하신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깨뜨리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의 참의미를 밝혀 주시는 분,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된 길이심을 예나 지금이나 분명히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준엄한 폭탄선언을 하셨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도 그 옛날 유대의 율법 학자마냥 시도 때도 없이 잘도 따진다. 타인의 잘못을 심하게 몰아세우기도.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재물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단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지침이다. 신앙인은 법을 따지기에 앞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 사랑 실천이, 삶의 기본 정신임을 언제나 명심해야만 할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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