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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7.2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25 조회수2,119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 2코린 4,7-150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많은 분들이 이런 기도를

바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 그들을 변화시켜 주세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그들을 깨우쳐주세요.

제발 그들이 저에게 상처 주는 것을

멈추게 해주세요.”
남들의 변화를 통해서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과연 주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사실 조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담긴

기도는 하느님의 모상보다

 자신들의 모상으로 상대방을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의도하신 뜻을

찾으려고 먼저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다고, 내 자신을 힘들게 만든다는

이유로 바뀌길 원한다면 결국

하느님 모상이 아니라

내 모상대로 상대방을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뜻보다는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뜻을

 좇는데 더 집중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주님, 그들을 변화시켜 주세요.”

가 아니라 이렇게 바뀌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소원이 있다면서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그 소원은 주님의 나라가 설 때

 아들 중 하나는 예수님 오른편에

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여깁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들도 그 자리를 탐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켜서 선수 쳤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을 보면서 영원한 생명의 자리는

 이 세상 죽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것임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을

자신들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고,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도 얻어야 할

자리를 뺏길 것 같다는 생각에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세상에서 보여주는 어떤 명예나

지위를 얻으려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경쟁과 질투와

다툼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청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다른 이들의 변화를

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있는

 내 자신이 될 수 있는 변화를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을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용기란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두렵지 않으면 용기도 없다.

(성 야고보 사도)


기도

“제 아들 때문에 걱정이에요.”

라면서 제게 고민을 털어놓은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이분의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대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고서는 얼마 못가서

 비전이 없다며 그만두고,

취업을 해도 회사에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서

금세 그만둔답니다.

그냥 집안에 있으면서 자신의

방청소조차 하지 않으며

게으름이란 게으름을 다 부리고 있지요.

아들에게 이렇게 살면 되겠냐면서

하소연도 해보았지만,

자기도 이러고 싶겠냐면서 오히려

 화를 내며 집을 나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또 집을 나갈까봐 싫은 소리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저렇게 의욕 없이 사는

모습이 안타깝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겠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아들을 위해 몇 가지 제안을

어머니께 먼저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다 필요 없어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화를 내고 집을 나갈 것이다.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어떻게 하겠냐는 등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께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자매님, 그럼 자매님께서는

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곧바로 “기도밖에 없지요.”라고

말씀하시면서 한숨을 쉬십니다.

그런데 정말로 기도밖에 없을까요?
‘응석받이로 키우는 것은 지나친

 관대함과 방임의 조화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다 알아서 해주시는 주님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으십니다.

 단지 기도를 통해 스스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응석받이로만

살려고 할까요?
지금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 대한

묵상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우리를 응석받이로 키우지 않기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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