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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7.26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26 조회수3,630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19년 7월 26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제1독서 탈출 20,1-17

그 무렵 주님께서

1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복음 마태 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아기가 뒤뚱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혹시라도

잘못 넘어질까 봐 불안합니다.

이런 예상대로 아기는 얼마 걷지

못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넘어질 때

아팠는지 큰 소리를 내며 웁니다.

하지만 잠시 뒤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또 다시 일어서서 걸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의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만약 아기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걷지 못하도록

부모가 늘 안거나 업고 다닌다면 어떨까요?

이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아기가 걷지 못하게 해서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보호가 진짜 사랑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넘어지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넘어지더라도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그냥 놔두고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시련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진짜 사랑일까요?

 아니면 어렵고 힘든 상황이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진짜 사랑일까요?

어떤 형제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가 이런 아픔을 겪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이를 그냥 보고만

계신다면 저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고백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갓난아기가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지켜만 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만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말이지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충분히 이겨내면서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씨 뿌리는 사람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시면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으로 비유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최고임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늘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늘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의 기준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

더욱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 말씀은 분명히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쓰러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빈스 롬바르디)

(어린 성모님과 그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


실수

실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실수를 하면 창피하고 위축될 뿐 아니라

무능하고 바보 같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실수를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자전거를 못타는 제게 친구는

친절하게 가르쳐주었지요.

그러나 앞으로 가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운동 신경이 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도 자전거를 타기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자꾸 쓰러지는 실수의 모습을

친구에게 계속 보여준다는 것 역시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넘어질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앞으로 갈 것을 생각해.”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요.

 저는 실수한다는 부끄러움에

머릿속에 넘어질 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생각한대로

넘어질 뿐이었습니다.
실수가 있어야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서신 것도

 이런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닐까요?

본인의 부족함,

나약함을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당시에 실패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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