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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루가12장 35절 - 40절)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8-11 조회수1,232 추천수0 반대(0) 신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루가12장 35절 - 40절)


 

(루가1235- 40절)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시는 주인을 맞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 성도의 삶, 깨어 있음이란 우리의 행위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며 종교행위에 열심을 내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신랑만이 구원의 주체이심을 확실하게 깨닫고 모든 관심을 우리의 신랑에게 돌리며 그에게만 영광과 가치를 돌리는 삶을 깨어 있는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자신들의 그 일상의 풍요에 도움이 될 만한 그 기름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데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일상은 인간의 가능성 과시(誇示) 잖아요. 일상은 그렇게 인간의 가능성 과시의 장이기 때문에 그 인간의 가능성을 몰수당한 이들에게는 일상보다 하느님 나라에 더 관심이 가게 되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의 병행구절이라 할 수 있는 루가복음 12장으로 가면 주님은 제자들의 일상을 다 차압해 버리시는 그런 장면이 나와요.

루가복음 1236 36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종들은 다른 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집안일도 해야 되고, 밭에 나가서 밭일도 해야 되고, 가족이 있으면 가족도 챙겨야 하고 할 일이 아주 많아요. 화장실도 가야죠. 밥도 먹어야 되고, 그런데 주님은 문 앞에 서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곧 거기 동그라미 치셔야 돼요. 곧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리에서 대기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건 억지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그것도 종들이 할 일 많은 종들이 문을 곧 열어줄 수 있는 자리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주인의 억지란 말입니다. 다른 일하다가 주인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단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는요. 곧 이라는 그 단어는요. 그러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은 다른 일상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서둘러 표현한 거란 말입니다. 오직 주님이 오시기만을 오매불망 바라면서 자신들의 일상이 자신들을 존재케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곧 주인만이 나의 생존의 근거가 되시고, 그 주인만이 나의 행복의 근원이심을 공고히 붙들라는 거예요.

그들의 행위가 어떻든 그건 상관없어요. 아무튼 그 주인에게만 관심의 초점을 다 두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그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함께 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는 분명 힘의 원리,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봤을 때 슬기로운 자의 행위가 아니었잖아요. 같이 자고 있었다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일상에 쓸 수 있었던 유용하게 쓸 수 있었던 기름을 그 신랑을 기다리는데에 사용하여 바보같이 쓰고 있었다라는 그것 때문에 '아 하느님에 의해 신랑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들은 바로 요런 자세로 사는 거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고 하느님에 의해 자고 있었는데 걔네들만 깨워서 문안으로 싹 끌어당긴 다음에 문을 잠궈버린 거예요.

그 나머지 다섯 처녀도 얼른 달려가서 기름을 사가지고 왔다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문 안 열어 줬단 말입니다. 자 그렇게 주님이 오실 때에 그 주님을 반겨 맞을수있는 고 자리에 서 있는, 바로 그 자들이 그 주님의 섬김 즉 십자가 은혜를 받은 자들이고 현실 속에서도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그런 참성도라는 거예요. 주님이 일단 선택하여 주님이 관계를 맺기 시작한 자들은 바로 고 자리로 끌려 내려간다란 뜻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산다라는거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지옥 가게요? 저부터 시작해가지고... 우리 그렇게 못 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 오면은 언제든지 그 문을 열어 주는 고 자리에 서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죠. 고게 바로 우리의 목표지점인 거예요.

루가복음 1237절 보세요.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왔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얼른 문을 열어 준 그런 종을 주인이 띠를 띠고 종들을 앉힌 후에 수종을 든다 그래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은 다른 곳에서는 종은 밭에 가서 죽어라고 일하고 와서 주인 밥상 차리고 주인이 밥 다 먹으면 그거 다 치우고도 '저 보상해 주세요' 이런 말할 수 있는 존재 아니다 라고 말씀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종이 그까짓 문 열어 줬다고 주인이 띠를 띠고 앉아 종들을 앉혀 놓고 수종을 든대요. 섬긴대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어차피 비유에요. 이비유에는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단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런 그림 어디서 보셨어요? 요한복음 13장에서 봤죠.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와요. 띠를 띠고 수건을 두르고 앉아서 제자들을 앉혀 놓고 수종을 든다 말입니다 고 그림인 거예요. 그렇게 주님께서 제자들의 수종을 들려고 하자 베드로가 뭐라 그러죠? '어찌 주님께서 저희의 발을 씻기시게 놔둘 수 있습니까'라고 만류를 하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내가 니 발 안 씻기면 너와 나와 관계가 없다' 그래요. 그러니까 주님이 종들의 발을 씻기시는 고 그림은 어떤 그림인 거예요? 주님과 종들의 관계성에 관한 그림이에요.

요한복음 138-10절을 보세요 8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이 말은 너희는 목욕해서 다 깨끗한데 발만 더러우니까 내가 발을 닦아줄게 이 말이 아니라, 너희는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다 깨끗한데 유다 요놈만 아니다란 뜻이에요. 바로 고 다음 구절에 나오잖아요.

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는 이미 목욕을 한 자들이므로 온몸이 깨끗하다고 선언을 하세요. 그 온몸에는 발이 들어가 있다? 아니다? 들어가 있죠. 그럼 발도 깨끗한 거예요? 아니에요? 깨끗한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깨끗한 발을 왜 닦아주냐 말이에요. 주님은 지금 그들의 온몸이 어떻게 해서 깨끗하게 되어진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거예요. 들의 온 몸이 깨끗하게 되어서 거룩하게 구별이 된 것은 그들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노력과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발 씻기심 주님이 종이 되어서 그들의 발을 씻기신 십자가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미리...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지만 제자들은 유다 빼놓고 하느님의 선택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죠. 그 선택은 중도에 실패될 수 없어요. 포기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십자가를 지게 되면 주님에 의해 택해진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주님이 지금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예고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제자들이 같이 자기의 발을 닦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발을 서로 씻겨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은 앉아있고 주님이 종이 되어서 그들의 발을 씻기는 것으로 그들이 온몸이 깨끗하게 된 것이다. 구원받게 된 것이다. 용서받게 된 것이다. 이걸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의 현실. 너희들은 나와의 관계성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지 내가 너희들의 발을 못 씻기게 하는 그 상관이 없는 관계성에서 멀어질 때 너희는 구원과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거란 뜻이에요. 너희들의 수고와 열심과 노력에 의해 너희가 깨끗해지는게 아니라 나와의 관계성. 예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라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돼요.

 

.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주인을 기다리는 모든 자가 깨어 있어야 돼요. 지금부터 그 깨어 있음 이라는게 무엇인지 함께 한번 고민해 보잔 말이에요. 우리가 반드시 이 비유의 배경으로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혼인잔치의 완료성이라는 점이에요. 혼인잔치는 완료됐다는 거예요. 종들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신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으시죠? 주님입니다. 이제 그 주인이 다시 돌아오신 그 가시적 귀환을 우리가 재림이라고 그래요. 그 재림의 때를 준비하라는 주님의 강화의 그 내러티브 안에 이 비유가 들어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신 주님이 가신 곳이 혼인잔치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잔칫집에서 내려오신대요. 그러니까 보세요. 열 처녀의 비유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합쳐보면 주님은 이미 완료된 혼인잔치에서 혼인잔치를 종결하기 위해 오는 거죠 이미 영원이라는 영역 속에서 완료가된 묵시가 이 세상에 역사로 펼쳐지는 것!, 이미 영원속에서 선택되어져 있고 완료되어 있는 것이에요.

 

魔鬼나라의 원리가 事必歸正 勸善懲惡의 기특한 원리로 돌아가는 거라면 하느님 나라의 원리는 漁父之利 無爲徒食의 원리로 운영되는 것이에요. 힘의 원리 속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내가 '왜 그래야 돼' 그러나 그래야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앉게 되고 왕이신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늘 용서하시는 자리에 앉아 계시고, 그분의 백성들은 늘 그분의 생명력, 바라크 복 은혜의 용서를 받는 자리에 내려가 있는게 하느님 나라의 구조예요.

하느님이 하느님 자리에 앉고 피조물이 피조물 자리에 앉는 상태를 사바쓰 안식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 상태를 하나됨, 혼인 등의 여러 단어로 표현하는 거예요. 하나됨은 우리는 완전히 부인되고 자기부인 자기 절망속에서 하느님 것이 완전히 부어져서 하느님이 누리는 것을 함께 누리게 되는 그 면목없는 상태가 하나됨이에요. 그게 혼인이에요. 그래서 바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혼인잔치가 기록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깨어있는 자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처녀가 자고 있었던 거예요. 저희는 이런 존재입니다가 폭로되는 상태가 깨어 있는 거예요.

온 세상은 다 자고 있어요. 다 자고 있는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한 무리가 있어요. 그들만이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하느님 나라로 그냥 반짝 들려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머지 다섯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라는게 들켜지자마자 내려오셔서 그냥 확 끌어당기고 문 닫아 버리는 거예요. 깨어 있어라, 기름을 준비해라, 열심히 수고해라, 전도해라, 선교해라, 헌금해라 그 이야기 아니란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거기에 여러분의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어요. 역시 그 행위의 중심은 나잖아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 하는 그 행위! 그게 죄란 말입니다. 왜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도대체 뭘 근거로? 그리고 나는 내 구원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 말이에요.

 

인류 최초의 결혼장면으로 가볼까요. 창세기 2장 보세요.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아담이라는 신랑을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옆구리를 뚫어서 심장을 지키고 있는 갈비뼈 하나를 뽑으세요. 그리고는 그것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세요. 하느님은 그 사람을 아담에게 데려오셨어요. 아담은 그 사람을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사랑고백을 합니다. ? 자기거 였거든요. 사랑고백을 해요. 그리고는 그 사랑고백과 함께 그에게 무언가를 주는데 그게 뭔줄 아세요? 여자라는 이름이에요. 여자라는 이름이에요.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라는 그 위대한 사랑고백과 함께 가는게 여자라는 이름이란 말입니다. 이 장면이 탈출기에서 율법의 옷을 입고 한번 등장하는데 한번 가보세요.

탈출기 2215-20. 15 ‘어떤 사람이 정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그와 동침하였을 경우, 신부 몸값을 내고 그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16 그 처녀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그에게 주는 것을 거절하면, 처녀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을 물어야 한다.’ 17 ‘너희는 주술쟁이 여자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18 짐승과 교접하는 자는 누구든 사형을 받아야 한다. 19 주님 말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는 처형되어야 한다.’ 20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여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기위해 지불해야하는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요걸 납회금이라 그래요. 납회금 여기서는 인제 신부 몸값이라고 나오는데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여자 가족이나 여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돈이예요. 중동지방에서는 요즘도 그래요. 이것이 요즘에는 이제 함이라는 것으로 여자집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것이 결혼식이 끝난 후에 폐백을 하는 것도 다 이와 상통하는 거예요.

 

남자가 성혼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신부 집에 하는게 폐백입니다. 그렇게 남자는 여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가 있는데 그것이 아내의 가치에 상응하는 예물이였어요. 이게 다 성경에서 나온겁니다. 아내의 가치 내가 이 아내를 얼마만큼 가치있게 생각하는가 만큼 돈을 냈다 말입니다. 남자분들 표정이 왜이래요? 흐흐흐 미쳤냐 지금 그러고 있죠? 난 돈을 더 받아야 된다 지금 그런 표정으로 흐흐 내가 아내를 이만큼 사랑합니다. 그리고 난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왜냐면 그 신부 몸값이 아내에게 가서 남편이 죽었을때의 생활비로 쓰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이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부 몸값은 아내의 몸값이기 이전에 신랑의 사랑고백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사랑고백. 집에가서 또 부부싸움 하지 마세요. 이 왠수야 그때 너는 함에다가 오징어 하나 넣었더라? 뭐 이런거... 오늘날은 다 변질돼갖구요. 아담이 그 신부 몸값로 여자라는 이름을 준거에요. 여자. 그 이름 안에는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이라는 아담의 사랑고백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렇게 남편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남편과 한몸인 여자의 탄생 이게 바로 혼인인 거예요. 이게 구원이에요. 이게 하나됨이에요.

그러니까 혼인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거지... 여러분끼리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어진게 아니에요. 그 제도는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게 왜 잠시 이 세상에서 주어졌냐면, 그 구원의 현실이 뭔지 깨달아 알으라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깊은 사랑. 이건 하나의 모형인 거예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신랑 예수와 그 아들의 신부인 교회와의 그 혼인잔치. 그 연합이 어떠한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알기 쉬운 그림이 아담과 이브의 탄생 이야기인 거예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크신 사랑으로 당신의 신부와 결혼을 해버리신다 말입니다. 그게 룻기인 거고, 거지에 불과했던 룻이 보아스와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신분이 격상되는 거죠. 지주가 되는 거예요. 구원이에요 그게. 그게 결혼이에요.

그런데 그 과정이 쉽지가 않아요. 하느님의 아들이 신부와 혼인을 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신부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어 있었잖아요. 신부가 싸늘하게 죽어 있는 거예요. 어떻게? 죄와 허물로 없음이에요. 그 죽어있는 없음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창조가 되는가가 창세기 1장에서 모형으로 그려지는 거예요. 그게 첫 창조란 말입니다. 없음에서 혼돈과 공허, 틀도 없고 스트럭쳐도 없고 공허 엠프티니스 내용도 없는거 공허 없는거에요. 그거 무예요. . 거기에서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틀이 세워지고 내용물이 채워지는가! 이 구원의 이야기를 모형으로 보여준거거든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없음이에요. 그때 신랑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빠져들죠. 죽음은 어떻게 메타포어 돼요? . 십자가 위에서 잠이 들어요. 누가? 신랑이. 그리고 그의 옆구리가 뚫리고 그의 심장을 막고 있던 갈비뼈가 적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랑의 몸의 일부로 신부가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으로 너는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여김을 받는 거예요. ?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했거든요. 하느님은 우리를 예수로 봐주셔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고백 때문에 그 사랑고백이 우리에게 부어졌고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아들과 우리가 한몸이되는 것이 구원이란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산자라는 이름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죽어있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와 혼인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게 창세기 2장이에요.

십자가에서 우리와 혼인을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름이 주어졌는데 그게 산자에요. 그건 어떻게 알아요? 창세기 315절 이후로 이제 넘어가 보면 알죠. 그러니까 구약만 알고 신약을 이해할 수 없고, 신약만 알고 구약은 이해 못하는 거예요. 넘어가보자구요. 그러면은 자 아담과 하와가 혼인을 하여 한몸이 됐어요. 그런데 신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 한몸의 관계가 깨져 버렸죠.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그랬는데 그 신부가 남편에게 핑계를 대고 남편은 신부에게 핑계를 대고 이 한몸됌이 깨져 버린거 아닙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게 신부의 죽음이죠. ? 남자에게서 나온 여자가 남자와 끊어졌을때 그게 곧 죽음아닙니까. 그래서 여자는 죽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무트 타무트. 죽음을 유보시킨게 아니라 죽은 거예요.

그런데 은혜로 살려내는 것이지 안죽인게 아닙니다. 죽은 거예요. 그건요. 출애굽기 22장이 그 상태를 간음이라고 그래요. 우상숭배라 그러죠. 그게 죽음이잖아요. 그래서 출애굽기 22장의 그 결혼에 대한 결례 밑에 갑자가 무당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간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거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핑계대면서 잘못을 전가하죠. 그때 하느님은 창세기 315절의 말씀을 주세요.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거고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라는 원시 복음이에요. 그 말은 하느님의 라인인 그 여자의 후손은 뱀에게 발뒷꿈치를 물려서 피를 빨리는 자로 살게 되는데 이게 십자가잖아요. 그 피 빨림이 바로 상대의 머리를 밟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상식으로 판단되어지는 이 힘의 원리와 도대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가 지금 여기에서 확 드러나는 것입니다. 뱀은 상대의 피를 빠는 방식으로 힘의 원리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살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기의 피와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게 요한복음 6장 이잖아요. 먹어라 그러잖아요.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기는 거라 말입니다. 이게 성령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복음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는 거예요. 어떻게 그게 승리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聖徒는 하느님 나라 갈 때 자기 이름 갖고 가면 안돼요. 무슨 이름 갖고 가야 돼요? 내 신랑 이름 갖고 가야 돼요. 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라고 가야지.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닌 사람은 홀로 단독자로 못들어가요. 그리스도의 신부에게만 산 자라는 이름이 주어져요. 그런데 이 시대는 오로지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요. 하느님도 자기의 이름을 위해 이용한다니깐요. 그 이름갖고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만 들어가야 돼요.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부로만. 하느님은 그렇게 복음을 이해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죠. 가죽옷은 부끄러움을 덮어 버렸어요.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하면서 부끄러움을 덮잖아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남자의 옷이 여자에게 덮이는건 곧 혼인을 의미하는 거였어요. 룻기에도 나오죠.

'나를 덮어 주세요' 그러죠. 룻이 보아스에게 혼인해달라는 뜻이거든요. 덮는 거예요. 그게 혼인이에요. 성경은 일점 일획의 헛점도 없어요. 오차도 없어요. 어떨땐 소름이 막 끼칠 정도에요. 하느님과 죄인의그 혼인의 모형이 창세기부터 쭉 묵시록까지. 그래서 요한묵시록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벗는게 맞는건지 입는게 맞는건지 그런걸로 싸우지 마세요. 그렇게 부끄러움이 덮이는 상태 죄와 허물의 죽음이 은혜로 덮이는 상태가 바로 한몸되기. 혼인이니까. 그래서 여자가 만들어지는 그 장면에서 혼인잔치가 거행되었던 거고, 고 밑에 아내라는 이름이 바로 나오는 거고, 그 자리에서 한몸사상이 선포되는 거예요. 한몸.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라는 그 한몸사상이 계속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그 예수의 공로로 예수와 한몸이되어 하느님과 한몸이 된다니깐요. 그러나 우리 능력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업적과 공로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면목없이 빈그릇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에제케엘서 166-14절 보세요.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죽어있는 피투성이의 여자를 왕후로 만들어 낸게 누구예요? 그냥 피투성이로 죽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씻기고 입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왕후 삼는걸 구원이고. 그게 혼인이라 말입니다. 그걸 알고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느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구나! 그게 깨어 있음이에요 그걸 아는 자는 다시 세상의 힘의 원리속으로 들어가도 '이건 아닌데...' 괴로와요 고통스러워요. 그때 자꾸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다니깐요. 그게 깨어 있음이에요. 세상으로부턴 조롱당하죠

어리석은 다섯처녀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신랑 때문에 일상에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는 잉여의 기름을 준비 안한다 말입니다. 경제적이니까. 효율적이니까. 힘의 원리 속에서 아주 지혜로운 이들이죠. 어리석은 자들은 그걸로 자기의 일상을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데 그걸 꾸미지 않고 오로지 신랑만 바라보면서 일상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거예요. 뭘 준비했다에 초점이 있는게 아니라 이 사람은 일상속에서 조롱을 받고 손해를 보고 있구나에 초점이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리고 자고 있어. 이건 병신들인 거예요. 이거는 신앙적으로 봐도 병신. 세상속에서 봐도 병신. 그런데 그가 깨어 있다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교회에서 반드시 그 취급을 받게 되어 있어요. 절대 우리의 빵 우리의 잘난 척을 못챙기게 하신다니깐요. 노아 보세요. 120년 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세상적 힘의 원리 안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배만 만들다가 갔어요. 고게 깨어 있음이에요. 그런데 세상에서 볼 때는 '빵 좀 만들어 이놈아. 너는 아무 필요도 없는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거야? 빵내놔 빵' 그게 성도입니다. 그 예수의그거 의지하고 면목없이 기다리는게 깨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다 쫓겨나는 거예요.

그 예복은 누가 주는 예복? 주인이 주는 예복이에요. 자기가 아무리 멋진 옷 피에르가르뎅 이거 좋은 것도 아닌가요? 주인이 준 옷 안입으면 다 쫓겨나요. 아무리 멋진 행위와 업적으로 여러분이 바리바리 싸들고 그 잔치에 가서 앉아있다 할지라도 주인이 준 그 의의 흰옷. 세마포.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그 옷. 그거 안입으면 다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거 입으라는 거예요. 보세요 창세기부터 복음서 서신서 요한묵시록이 하나로 다 연결이 되어 있잖아요. 이게 묵시라는 거예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뭉쳐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중심으로!



뭐 그렇게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으세요? 뭐 그렇게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으십니까? 어차피 하느님 앞에서 뒤집어 보면 다 똥덩어리인거...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청문회 한번 할까요? 흐흐 개 지랄들을 떨면서 하느님 앞에서 잘난척들 하고 있어요. 세상 전체가 다!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의의 옷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의 의가 아니면 다 죽습니다. 그거 붙드셔야 돼요. 그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그걸 가르쳐 주는데가 없어요. 예수 이야기 십자가 피의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해주는데가 없다 말입니다. 빵만들라고 니네 일상에서도 빵만드는게 왔다라고... 여러분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사람들이 왜 잔치 초청에 응하지 않았습니까? 소도 사야하고, 장가가야 하고, 밭에 또 밭에도 나가야 하기 때문에... 뭐예요? 떡만들어야 되거던요. 이 뜻이에요. 성도에게는 세상과 내 자신이 무가치하고 허황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일상에 매어 잔치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깨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일상에 매어 있으면 잔치에 안가고 싶다니깐요. 우리는 자나깨나 예수님의 의. 그 의의 흰옷만 구하는 자가 되야 돼요. 다시 한번 우리는 떡을 내놓아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존재에게 빵을 내 놓아서 사는 게 아니라 입벌리고 빵 받아먹는 자란 말입니다. 한군데 한번 보죠. 요한복음 633-35.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먹어라 그러잖아요. 나를 먹어라. 언제 예수님이 빵 내놔라 그랬어요? 나를 먹어라 그랬지. 인간은 그 어떤 종류의 빵으로도 행복에 이를 수 없어요. 그 말은 그 어떤 노력과 시도로도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방법으로는 죽음에 속해있는 자들이 살아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통하여 자신이 내어 놓을 빵을 만드는데 분주한 자가 아니라 신랑의 공로로 완료된 그 혼인잔치의 은혜성을 알게 된 자들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혼인잔치에만 관심이 가 있으니까. ? 나는 거저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되어 있거든요. 내가 신부거든요. 그러니까 혼인잔치와 관계있는 존재들이 다 기다려지는 거예요. 그들만 기다려지는 거예요. 그걸 깨어 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 그들이 깨어 있음인 거예요.

소유의빵, 물질의빵, 선행의빵, 열심의빵, 착함의빵 세상은 많은 빵을 생산해 내라고 요구해요.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통하여 그 빵을 생산해 내느라 동분서주할 때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완료된 그 말씀으로 사는거다라고 외치면서 우리 신랑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그러니까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에요. 어딜 바라보고 있느냐! 다 자고 있었지만, 나는 왜 육신을 입고 있으니까 자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이렇게 잠들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니까 '신랑이여 어서 그 완료된 혼인잔치로 나를 데려가 주소서' 그게 깨어 있는 자에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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