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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8.1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8-16 조회수1,50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여호 24,1-13

그 무렵

1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2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3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4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5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6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7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8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복음 마태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어느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무로 만들면 나막신이라고 하지.

고무로 만들면 고무신,

털로 만들면 털신이라고 해.

그렇다면 사랑으로 만든 신은 무엇일까?”
아내가 답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편은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당신이야.”
맞습니다. 나의 배우자인 ‘당신’은

 사랑으로 만든 신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당신’이

되는 것이지, 세상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당신’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이분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를 만나면서

고민에 빠졌지요. 내 배우자를

사랑하느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내 삶의 50%로,

나머지 50%로 사랑을

 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일과

남자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얼마 뒤에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

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사랑은 언제나 100%로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일에 대한 사랑 50%까지

합해져서 내 삶의 지평이 150%로

늘어나는 것이었어요.”
한 남자를 사랑하면서 표정이

 밝아졌고 일을 더욱더 기쁘게

할 수 있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직장 안에서의

평가도 더 좋아졌습니다.

사랑을 통해 삶의 지평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지 않나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라고 묻습니다. 사랑을

늘 강조하셨던 예수님이기에

“안 된다.”라고 말하면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냐면서 따질 것이고,

“율법에 있으니 된다.”라고 말하면

 “그러면 이제까지 당신이 말한

사랑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따질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내를 버리려고 하는 남편은

아내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혼인을 해소하는

 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그런 법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길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의 질문 안에는

사랑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성실한

관계를 맺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많은 배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간직하고 실천하십시오.

내 삶의 지평이 훨씬 더 커집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사랑은 우리 자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무척 어려운 깨달음이다.

(아이리스 머독)

(내일 제 조카가 혼인성사를 받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길...)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삶.

컴퓨터 본체를 뜯게 되었습니다.

먼지가 겉에서도 보일 정도로

많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체를 열어서

부품 하나하나를 빼서

먼지를 깨끗이 제거했지요.

이렇게 청소를 깨끗하게

한 뒤에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완벽하게 조립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빠졌는지

 나사 하나가 남는 것입니다.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컴퓨터 본체를 닫고서

 전원을 켰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저의 예상과 달리 듣기에 불쾌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이 나사못이 없기에 제대로

 조여주지 못했고 그래서

그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었지요.
그냥 하나의 나사못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작은 나사못도 컴퓨터 안에서는

 꼭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스스로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만,

필요 없는 삶은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삶.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의 자리를 용감히 지키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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