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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8.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8-18 조회수1,37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9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예레 38,4-6.8-10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제2독서 히브 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 루카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어떤 아이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급하게 이송되었습니다.

골절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사고로 인해 심장과 뇌에 심한

손상이 온 것입니다.

병원의 의료진들은 가망이 없을 것

같다면서 이 아이의 어머니에게

준비하라는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이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면서 가망이 없다는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수술 후, 어머니께서는 의료진을 비롯해서

사람들에게 아들의 완쾌를 의심하는

표현을 아들 앞에서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전혀 들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상관없이 아들의 귀에다

완쾌할 것이라는 확신의 말을

계속해서 들려주었습니다.
며칠 뒤, 아들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깨어났습니다. 깨어나도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들은 몇 달 뒤에는 정상인처럼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불가능을 이겨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의식중이지만 어머니의 긍정적인

말이 작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의 힘은 대단합니다.

말은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어떤 생각과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행동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정적인 말,

한계를 짓는 말, 힘이 빠지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희망을 보여주는 말과 생각이 아니라,

의욕을 꺾어버리는 말과 생각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사랑의 불이고,

 정의의 불이었습니다.

촛불은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지요.

 또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서

 장작은 자신을 태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그런 불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완전히 태우는,

 하나도 남김없이 태우는 불의 삶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태우는 불이 되기

위해서는 큰 아픔이 동반될 수도 있습니다.

남들에게 오해를 사서 외면을 당할 수도 있고,

남들과 다른 모습에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피우기 위해 위선적인 삶을 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남들처럼 부정적인 생각과 말로 희망의

 주님 곁에서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눈에서는 분열로

보이지만 참 진리의 길을 향하는

우리가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긍정적인 생각과 말,

남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당장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합시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대한보다

조금만 더 많이 실천하라.

(조웰 토마스)

(도포입으신 예수님)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는 4가지 말.

어떤 책에서, 이 세상에는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는

4가지 말이 있다고

작가는 표현합니다.

 그 단어는 ‘못해.’, ‘필요하다.’, ‘

나쁜’, ‘해보다’라고 합니다.

사실 ‘못해’와 ‘나쁜’은 그럴 것 같다

라고 생각되었지만, ‘필요하다’와

 ‘해보다’가 왜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는 말인가 싶더군요.

그런데 그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것 같다 싶습니다.
첫째, ‘못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이룰 가능성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둘째, ‘필요하다.’라는 이 말을

하는 순간 다른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새 옷이 필요해’라고

생각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옷만 보이게 되지요.

 셋째는 ‘나쁜’이라는 말은

사고를 제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강점, 좋은 점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보다’는 말은

 실패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해볼게”라는

 말은 공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부할게”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심코

쓰고 있는 말들로

그 가능성과 의지를 앗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말도 잘 써야 할 듯합니다.

(마재성지의 순교자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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