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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창조사업 구원사업 성화사업)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8-22 조회수1,225 추천수0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창조사업 구원사업 성화사업

찬미예수님!

지난 주일이 성령 강림 대축일

봉헌하신 후 뽑아 가신 것 기억하세요?

그 열매 맺으셔야 합니다.

성령이 어떤 분이시라고 했지요?

성부를 아버지, 성자를 아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라고 했죠.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힘,

사제를 사제답게 하고

수녀들을 수녀답게 하는

힘이라 했습니다.

사제에게서 성령이 빠져버리면

그냥 직업인이에요.

수녀들에게서 성령을 역사를 못 보면

그냥 수도복만 입고 있는 여자에요.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서로에게서 찾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세례 때 주신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으로

산다는 것은 뭡니까?

봉사하는 데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봉사하는 척만 하며 생색만 내고

안 알아주면 서운해요.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는 봉사는

늘 하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보든 안보든, 왼손이 하는 것

오른손 모르게 하려고 애써요.

그리스도 왕직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할 때는

자유인이 되는 거죠.

노예들은 쇠사슬에 묶이고,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묶을

허리띠를 잘 때는 빼앗았어요.

바지 잡고서는 도망 못 가죠?

신발도 다 빼앗고요.

그러나 왕은 자유에요.

그리스도 왕처럼 우리 평신도도

성령이 함께 할 때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요.

돈의 노예, 교만의 노예,

분노의 노예, 아집과 고집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져요.

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청주교구 사제단 피정이 있었어요.

나이든 신부들은 꽃동네에서,

젊은 신부들은 대전 신학교

하상바오로 교육관에서 했죠.

우리 꽃동네연수원에는

안동 교구장으로 계시다 은퇴하신

두봉주교님이 강사로 오셨어요.

그분 연세가 올해 90이신데

신부들 피정을 했어요.

나는 그분을 딱 세 번 봤어요.

예전 70년대 신학생 때 신학교 미사 때,

두 번째는 25년 전에

청주교구 사제 피정할 때,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죠.

아마 신학교 때는 그분이

40대였을 거고,

25년 전에는 60후반,

지금은 90이시죠.

이제는 연세가 있으시니까

목소리도 쉰 소리가 나고 작아요.

한국 사람보다도 한국말을

더 잘 했던 프랑스분인데

이제는 발음이 잘 안 들려요.

이렇게 연세가 드시면서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안 변화는 것이 있었어요.

수십 년에 봤을 때나

지금 봤을 때나 아기 같아요.

깔깔대고 하얀 백지 같은 분이야.

그분을 일주일 동안 뵈면서

그분 강론은 하나도 안 들어왔어요.

그분의 강론보다도 그분의 모습에

자유인이구나!’

그분에게는 권위라고 하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어요.

어른들은 권위가 있어야 되지만,

참다운 권위가 나오려면

인격이 있어야 돼요.

인격이 없는 인간에게 권위를 주면

권력을 휘두르죠.

참다운 권위인 봉사,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군림을 해요

두봉 주교님은 은퇴 후 행주대교

부근의 조그만 공소에서 매일미사

드리시며 교우집 방문하고 길 가다가

노인들 있으면 막걸리 사서 같이

나눠먹곤 하셨죠.

주교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 살지 않았어요.

사제도 열려있지 않으면 사제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 사는 거죠.

조직 안에서 살기 때문에 조직의

(rule,규칙)은 지켜야 되지만

열려 있어야 돼요.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자기가 만든 감옥에서 나오지 못 합니다.

저는 같이 피정하는 신부님들께

그런 얘기를 했지요.

그분이 이번에 한 강론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그분은 그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까?

어떻게 저렇게 순수하게 사실까?

어떻게 저렇게 열려있을까?

정말 아버지 같은 부성을

가지고 사시는구나.

저런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성령이 함께 하시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스도 예언직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하시어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시 않으면

세례 받고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예수님 못 알립니다.

알리고 쉽지도 않고 자신도 없고,

내 주제에 무슨 남을 성당으로 이끌어?’

본인 자신이 그리스도의 왕직,

예언직, 사제직이라고 하는 이 세상의

누구도 그런 고귀한 직책에 오를 수

없었음에도, 본인은 분명히 세례 받을 때

그 직책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알지도

못할뿐더러 성장이 될 수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지난 주일 저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운은 각자가 자기 꼴을 찾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 위격이

세 개가 있다고 하는 이 진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완전한 신비입니다.

작은 그릇에 아무리 물을 부어봐야

물이 차면 그 이상은

흘러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무한한 하느님을 이 유한한 머리에서

깨달으려 하는 것이 논리적 모순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따지고 드는

교리가 아니라 믿을 교리입니다.

여러분들, 아버지, 엄마, 내 친부모

아니라고 의심해본 적 한 번도 없죠?

따지지 않고 이 분이

내 부모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처럼

한 분이신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같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구약성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왜냐? 구약시대 사람들에게는

삼위일체는 알기 어려운 수준이었기에

오직 유일하신 하느님 야훼에 대한

신앙만을 구약성서는 가르침으로 줍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여러 군데에서

구체적 계시하고 계시죠.

루가복음 135절에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요한복음 149절 이후 등에도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신약성서에는

여러 군데 얘기합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느님에서 구별되면서

완전히 동등하신 삼위가 계시고

그 삼위에 관계는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이 회사를

차려놓고 사업을 하고 계신데,

성부는 창조사업이요,

성자는 구원사업이요,

성령은 성화사업이다.

천주교 교리죠.

성부는 무슨 사업을 하신다구요?

세상 모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주셨다는 겁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모든 것이 그분의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창조사업의 밑바탕에는

사랑이 없으면 안 돼요.

미움이 밑바탕이 되어 있을 때는

파괴가 됩니다.

미움을 가지고 누구를 대할 때는

양쪽이 다 파괴가 됩니다.

인간은 창조사업의 협조자라고 그럽니다.

크리스챤은 모범을 보여야 할

특별한 협조자라 부릅니다.

자연보호, 낙태반대 등에 앞장서야 된다고

교회의 가르침은 전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반창조적이고

반인간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교회, 가정, 직장에서 영적인

창조의 협조자로 살아야 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죠.

따뜻하게 웃어주는 것도 영적 창조입니다.

말 쏘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도

친절해 주는 것도 영적 창조입니다.

온유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영적인 창조입니다.

한마디로 주변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영적인 창조입니다.

성부께서 사랑으로 창조하고

지금도 진행형이듯 그분의 협조자인

우리에게는 영적인 창조를 해야 될

선택권이 아닌 의무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자는

구원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죄 많은 인간 쪽에서는

계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하느님과 끊어진 다리를

인간 쪽에서 아무리

보수를 해도 연결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쪽에서 끊어진 다리를

이으려고 성자를 보낸 것이

바로 구원사업입니다.

성자께서 낮은 모습으로

온갖 수모와 고통을 참고

돌아가실 수 있는 힘은 뭘까요?

예수님의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매 맞으신 분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뺨 때릴 때

맞으셨던 분이 아니시죠.

그분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돌멩이

맞아도 돌멩이 안 던지신 분이 아닙니다.

말만 하면 천사 군대를 끌어내실 수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밑바탕에는 순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온갖 고통과 수모와 멸시를 당해도

예수님은 성부께 죽기까지

순명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구원사업이 이루어졌던 거죠.

따지고 보면 순명만큼 인간이

넘기 힘든 벽은 없습니다.

왜냐면 반이성적이고 반합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순명입니다. 큰 벽이죠.

사제는 서품 때 세 가지 서약 중에서

제일 힘든 것이 순명 서약입니다.

36년 사제생활하면서 아이 짜증나.

한바탕 하고 나가버려.’

이럴 때 왜 없었겠습니까?

그럴 때 마다 순명의 열쇠를 가지고

해결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결과는 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순명하는 자에게는 하느님은 치유를 주시고

기적을 내리시고 구마를 시키십니다.

순명만큼 인간의 이성과

부딪치는 것은 없지만

또한 순명만큼 아름답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덕도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의 가장 큰 무기는 순명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순명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그리고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순명 않는 자는 아무리 똑똑하고

은사를 받았어도 교회를 떠나

교주밖에 될 수 없습니다.

설령 떠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분란을 일으킵니다.

순명 하는 척 하는 것과

정말 죽기까지 순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순명 서약할 때 하는 것과

정말 순명해야 될 위기의 순간에

다른 것 다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면서 순명의 삶을

걷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여러분들도 성자께서 성부께 순명하셨듯이

여러분도 교회에 순명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순명하시고,

남편도 지혜로운 아내의 충고에

순명하시기 바랍니다.

시부모에게 순명하십시오.

여러분의 양심의 소리에 순명하십시오.

여러분 본당 신부가 빗나지만 않는

사제라면 사제가 하는 말에

여러분들은 순명하십시오.

목자는 그 양들을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분명히 안내할 겁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목자와 양 사이를 이간질 시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에

쉽게 넘어가 버립니다.

성자의 구원사업은 순명이라고 하는

바위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성화사업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사업이라고 했습니다.

두 분에게서 뿜어 나오는 힘,

사제를 사제답게 하고 자기 꼴을

찾게 하는 힘이라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을 성화시키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늘 우리를

꽃밭 속에서 성화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늘 가시밭 속에서, 절벽 끝에서,

벼랑 끝에서, 한마디로 사건을

통해서 성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대부분

고통이 따르는 사건들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통하여 성화되었듯이,

다윗 성왕이 범죄한 후 회개한 후

성왕이 되었듯이, 베드로가 세 번의

배반 후에 성화가 되었듯이,

고통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삼위일체대축일에 딱 세 가지 단어만

기억하도록 합시다.

성부께서 창조사업을 하신 것은 사랑이다.

우리들도 영적사업에 협조자가 되기 위해

따뜻한 말, 온유한 표정으로 평화를 가져오자,

또 세제를 가능한 적게 쓰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려고 애써야한다.

우리는 사랑을 가져야만 창조사업을 할 수 있다.

성자의 구원사업에 밑바탕이 된 것은 순명이다.

순명은 여러분의 입맛에 골라 하는 게

순명이 아닙니다.

반이성적이고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거라고 하더라도 일단 하십시오.

그 결과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느님께

완성시켜 주실 겁니다.

그래서 순명하는 자는 기적이

뭔지 체험하게 됩니다.

순명하는 자는 치유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집니다.

마지막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사업 하시는데,

그 성화사업 하는 장소는 꽃밭이 아니라

대부분 고통스러운 사건 속,

맞다닥뜨리기 싫은 환경 속에서

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신다는 겁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장소는

꽃밭 속이 아니라 가시덤불 속이었습니다.

성인성녀들도 순탄할 때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늘 역경 중에

성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창조사업, 구원사업,

성화사업에 게을리 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도록 합시다.

아멘.

2019년 삼위일체대축일 (6/16)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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