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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등에 있는 짐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01 조회수1,314 추천수0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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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내 등에 있는 짐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서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이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 물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 짐, 슬픈 이별의 짐 그리고 사목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서비스아카데미 연수자료 중에서 / 창골산 봉서방)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사명의 확신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의 확신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 이 짧은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은 자기의 은사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기적이나 이상으로 이런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경우는 제외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명을 말할 순 없습니다. 또한 사명은 신앙을 기본으로 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신앙인이면서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명에는 우선 내적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각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사명에 대한 내적 확신이 없는 사람의 신앙 생활은 힘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명은 '은사'와 함께 주어집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지 않으셨고, 베드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을 위해 일할 사명을 주셨죠. 그것은 바오로가 가진 은사와 그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 일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그렇게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형제자매님은 사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자매님은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잘 하실 수 있습니까?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형제자매님의 달란트, 재능이 무엇입니까? 그곳에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엿장수에게 엿을 팔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사명으로 주십니다.
요약하면, 사명에 대한 확신은 그 개인의 신앙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르고, 그 방법과 확신의 과정이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사명자답게, 직분자답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명은 이미 주신 은사와 달란트, 재능의 범위 내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골산 봉서방"에서 hijjang)






하느님 관점에서 본 장애인 이해 9가지



1. 장애인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탈출기 4,11)

작품이란 상품과는 다르게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이 아닌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의 뜻과 혼을 담아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것을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장애인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한 섭리 가운데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장애인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뜻을 간직한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장애인을 통하여 우리들의 영적 장애를 깨닫게 하시고, 만족하는 삶의 비결을 배우게 하시며, 진정한 성숙과 강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따라서 장애인(障碍人)은 장애인(長愛人)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장애인은 성숙한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마태 18,1-10)

우리나라의 인간문화재 가운데 병신춤을 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부가 장애인의 약점을 가지고 흉내내어 춤을 추는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특별히 보호를 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사회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미성숙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통하여 기쁨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도움을 청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할 수 있는 용기는 성숙함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숙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곳은 서로의 다른 특성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업신여기는 용기를 가진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3. 장애인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1코린 1,27-29)

장애는 질병과는 다르게 평생을 씨름해야 할 만성적 슬픔이며 사람이 극복하기 힘든 한계적 상황입니다. 따라서 능력이 중시되는 경쟁사회에서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적 불리한 존재로서 낮은 자존감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지 불쌍하게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장애인 - 이들은 하느님에게 쓸모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상대가치의 범주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채 욕망의 노예요, 경쟁의 투사가 되어 살아가는 영적 장애인들에게 육신적 장애는 분명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입니다.


4. 장애는 벌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요한 9,1-5. 39)

제자들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질문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선입견을 단호히 배격하시며 시각장애인을 통하여 "하느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한 9,3) 그것은 육신적 장애를 치유(25절)하는 일과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인적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으로 일찍이 하느님께서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내용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실현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며 세상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강력히 임한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과 직결됨을 살펴볼 때 장애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인 것입니다.


5. 장애인은 들러리가 아닌 복음의 주체입니다 (루카 14,12-14. 21)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악인과 선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거부하자 주인이신 하느님이 화가 나서 어떤 특정한 대상들을 지목하여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이며 장애인들입니다. 들러리가 아닌 초청 받은 주빈(the guest of honor)입니다. 이들은 잔치에 초청 받고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지 못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에 꼭 맞는 것입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을 갖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6.장애인은 우리가 도와줘야 할 나의 이웃입니다 (루카 10,30-37)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 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구원 받은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경건의 생활은 생명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보 1,27)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인도 고아와 과부처럼 도움을 줘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7.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셔서 믿음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잠언 3,11-12)

하느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십니다. 욥처럼 고난을 통하여 단련케 하시며 믿음의 높은 산봉우리에 우뚝 서게 하십니다. 장애는 분명 한계 상황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곧 한계상황을 두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어떤 고난도 문제는 아니며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도구입니다(시편 119,71)


8. 장애인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요한 17,11)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하여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하나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과 희생을 부르짖는 교회에서는 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인일지는 몰라도 교회의 하나됨과 성숙함을 위하여 장애인은 함께 해야 합니다. 장애인사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 사목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목입니다.

교회는 건강한 체질을 위하여 장애인들을 구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전교와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9. 인류역사에 위대한 공헌을 했던 장애인들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요한 17,11)

*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천체물리학자 스티브 호킹 박사 [ 루게릭병/전신마비장애인 ] 
* 흑인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Steive Wond [ 시각장애인 ] 
* 음악의 성인 베토벤 [ 청각장애인 ] 
* 초인적인 의지로 세계인에게 도전을 주었던 헬렌켈러 [ 언어, 시각, 청각장애인 ] 
*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의 사자와 씨름하다 엉덩이 뼈를 다쳐 지체장애인이 된 야곱(창세 32,31) 
* 예로보암 시대에 시각장애를 가지고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했던 아히야(1열왕 14,4) 
* 이스라엘의 적 블레셋 사람 삼천 명을 죽였던 이스라엘의 시각장애인 삼손(판관 16,21) 
* 원형탈모증의 장애를 극복하고 멋있게 쓰임 받았던 엘리사(2열왕 2,23) 
* 눈의 질환으로 고통을 겪었으나 평생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순종했던 사도 바오로(2코린 12,7) 
* 의심 많은 토마스를 위하여 영광의 부활체를 포기하고 영원한 장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요한 20,27)

(김해용님)






조지 뮐러의 대답



영국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에 말년에 뮐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느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조지 뮐러의 대답은 간단한 대답이지만
가장 중요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부인" 이라는 기초위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때 비로소
성경적인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쳐서 날마다 죽이는 것이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기도와 은총, 성령충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 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생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임신하지 못하는 부부를 위한 기도


우리 조상들의 주 하느님, 주님은 진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그에게 동무로 주시어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번식하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자비를 가지고 내려오시어 원수가 간음과 실망이라는 두 가지 죄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닫아 놓았던 태를 열어 수태시켜 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조물주, 거룩하신 아버지, 이 두 자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들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내는 포도나무와 같이 번식력이 있게 하시고, 남편은 그를 받쳐주는 지주(支柱)와 같이 그의 보호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생명이여, 내려와 생명을 주십시오. 오 불이여, 내려와 다시 따뜻하게 하십시오. 능하신 분이여, 내려와 행하십시오. 내려오십시오! 

올해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찬미의 축제를 위하여 이들이 산 곡식다발을, 즉 주님께 바라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영원하신 주님께 봉헌된 그들의 맏아들을 바치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시 )


(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

 


 

 




교만의 증상들



이기심

자기의 욕심을 감추기 위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짓밟고 있다면, 자기의 재능을 활용해도 다른 이에게 축복이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재능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교만으로 인해서 섬김을 받고자 하며, 항상 자기만 옳다고 여기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소원이 항상 성취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된다.


우월감

교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시하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교리나 행동, 고유의 가치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기게 만든다.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교리나 불화가 아니라 바로 교만이다. 서로에게 주고받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모든 분쟁과 분열, 불신, 갈등과 불화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비꼬는 말

비꼬는 말은 위장된 유머로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부각시켜 상처를 입히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편견을 드러낸다. 비꼬는 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감정이 상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당당히 그것을 다룰 용기가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쓴뿌리가 자라나는 것이다.


정죄와 비난

교만한 자는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장점이 드러나면 삐딱하게 받아서 무시해 버린다.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이나 은혜를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모함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한 점에 대해 있는대로 얘기해 버리는 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모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참지 못함

참지 못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계획, 일정을 사람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참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사랑과 절제가 없다는 증거다.


탐심

질투와 탐심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탐심은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는 동떨어진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갈망할 것이다.


강퍅한 마음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은근히 기뻐한다. 다른 이들을 위로할 줄도 격려할 줄도 모르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일에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한다. 강팍한 마음으로 변해가는 첫 단계는 싫어하는 사람과 마주하지 않는 것이다.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되면서 서서히 냉각되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그대로 방치하면 교만에 뿌리를 내린다.


배우기 싫어하는 마음

고침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말을 경청하는가?, 화를 내는가? 합리화하고 변명하는가? 아니면, 해명하는가? 성숙한 사람일수록 남의 충고나 지적을 잘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훈계 속에는 최소한의 진실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아부

칭찬과 아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칭찬은 다른 사람을 신실히 세워주기 위한 것이지만, 아부는 조종하려는 의도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행위이다.


자기연민

상처받고 지치고 약점잡히고 오해받고 압박받고 죄를 지을 떄, 그리고 낙심하거나 침체될 때 우리는 쉽게 자기연민에 빠진다. 이런 습관을 깨뜨리기 위해 때로는 격전을 치러야 하며,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기 연민은 교만을 조장하며 그 이면에 있는 이기적인 목적을 합리화한다. 만족할 줄 모르며 이기적이기 때문에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한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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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돌아가신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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