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9.1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4 조회수1,38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제1독서 민수 21,4ㄴ-9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복음 요한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부정적인 결과만

지레짐작하며 속만 끓이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런 이들과 함께 있으면

힘이 빠지지요. 희망의 말은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만, 부정적인 말은

의욕을 꺾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위인은 ‘부딪혀보고,

 시도하라.’라고 말합니다.

시도하지 않은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의욕을 키우는 사람인지,

아니면 의욕을 꺾어버리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원칙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원칙은 ‘내가 받아들인 것만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이 거부한 것은

내게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용서를 거부한 것이지요.

‘돈 없이는 못살아!’라고 말한다면,

돈 없는 삶을 거부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싫어!’는 무엇일까요?

나의 이웃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거부하는 마음은 그대로

내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고,

 그 부정적인 마음만

자기 안에 남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변화의 시작이 바로

받아들임에 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거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구원의 길은 절대로

열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주님의

할 수 없는 사랑을

명하게 보여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이

죽지 않았던 것처럼,

십자가로 들러 올려진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몸과 마음으로

 죄를 지어 자초한 모든 죽음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기뻐하면서,

축제의 예복을 입고 자기 신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경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귀중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래서 어떤 변화를 주님을

위해서 하고 있을까요?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아무리 무겁고

힘들다 하더라도 거부하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주님처럼,

우리도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한층 더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큰 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룰 수 있는 작은 꿈,

그리고 내가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꿈이 필요하다.

그냥 상상 속에만

있는 큰 꿈은 필요 없다.

(느보산의 십자가)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어젯밤에는 써야 할 글이 많은데

도대체 방에서 글이

써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머리라도

식힐 겸 차를 끌고 나왔습니다.

동네의 카페에 가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큰 도로로 나오자마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명절을 보낸 사람들의 귀성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습니다.

안 막히는 반대쪽으로 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다시 성지로 돌아올 때는

저 역시 이 꽉 막히는 행렬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시간 후면 차량 흐름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카페에 들어가 3시간 동안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어차피 나가 봐야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니까요.

3시간 동안 꼼짝 못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요?

집중이 잘 되면서 원하는 만큼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작가는 자신의 탈출구를

 아예 막아 버린다는 이야기가

 떠올려졌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해가 질 때까지 절대 나에게 옷을

 갖다 주지 마라!”라고 했고,

작가 이외수는 “이 원고를

탈고할 때까지 절대 철창문을

열어주지 마시오!”라고 했다고 하지요.
때로는 나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좀 더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지요.

 과거의 성인·성녀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분들도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산으로

또 사막으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주님을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어제 연령들을 위해 초를 켜고 함께

미사봉헌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