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4주일] 회개 (루카 15,1-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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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9-09-15 | 조회수1,40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연중 제24주일] 회개 (루카 15,1-32)
주님께서는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제사 지내는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시다가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재앙을 거두신다. (탈출 32,7-11.13-14)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한 죄인임에도, 사도의
직무를 맡기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1티모 1,12-17)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시며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드신다. (루카 15,1-32)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탈출32,7-11.13-14)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내가 이 백성들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9-10)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뻣뻣한'이라고 번역된 '케셰'(qesheh)는 아마 농경 문화의 배경에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이것은 '멍에를 지우는 데 대한 황소의 반항적인 반발'을 의미하는 말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말이 성경에서는 '뻔뻔스럽고'(shameless), '오만(거만)한'(insolent), '완고한'(harden) 상태를 가리키는 관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신명9,6; 2역대30,8; 느헤9,16; 사도7,51).
즉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집센 모습이 마치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버티는 미련한 소와 같다는 말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나를 말리지 마라'로 번역된 '한니하 리'(hanniha li; leave me alone)에서 '한니하'(hanniha; '말리지 마라','하게 하라')의 원형은 '누아흐'(nuah)인데, '내려앉다','멈추어 서다'(민수10,36), '쉬다'(탈출20,11), '휴식을 취하다', '편안히 쉬다'(이사23,12) 등의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편히 쉬게 하다','홀로 쉬게 하다'(이사28,12)라는 의미이며, 명령형으로 사용된 것을 감안해서 '나를 홀로 있게 하여라'(let me alone)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절교선언(絶交宣言) 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백성을 노예생활하던 이집트 땅에서 해방시켜 인도하시고 이들을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나 하느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완고하고 사악한 백성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이제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내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다(창세12,2). 그런데 이 약속이 아브라함이 아닌 모세에게 다시 주어지고 있다. 모세에게 주신 이 약속은 단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계약의 상속자라는 자격이 있다는 이유로 주신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당신의 뜻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고, 모세를 제2의 아브라함으로 삼아 그의 후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겠다는 뜻을 밝히신 것이다.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복음 (루카15,1-32)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정한 자 혹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애초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한결같이 거부하므로(루카14,18~20), 그들은 단 한 명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루카14,24).
그래서 대신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사람들, 곧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과 식사를 즐기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랑하는 율법과 거리가 먼 이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신 이유는 당신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선취하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루카14장).
여기서 '받아들이고'로 번역된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 receives; welcomes)의 원형 '프로스데코마이'(prosdechomai)는 어떤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며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로마16,2; 필리2,29). 즉 '프로스데케타이'(prosdechetai)는 도움을 얻거나 존경하기 때문에 맞아들이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실 때, 마치 유대인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하듯 하신 것이다. 경멸받으며 기피되던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파격적 행동은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아냥거린 것이다(루카7,34).
유대인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같은 부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들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필리2,7). 하지만 잃어버린 자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청을 받아들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들이 분명하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카 복음 15장 6절과 10절이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의 결론이 되어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기쁨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찾고 찾으시는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발견할 때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을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아온 죄인들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반드시 놀라운 기쁨이 생겨난다. 루카
복음 15장 10절의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표현은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속한 천사들도 기뻐할 정도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임을
나타낸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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