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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9.2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26 조회수1,470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까 1,1-8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복음 루카 9,7-9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미국의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엘렌 랭거(Ellen Langer)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난처한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1) 수업 들어가기 직전

 45명 학생 전체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상황.
2) 아주 매력적이지만 대단히

차가워 보이는 이성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상황.
3) 아주 싫어하는 두 사람이

속해 있는 위원회에 제3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상황.
이 세 가지 난처한 상황에 대해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째 그룹에는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할지

 방법을 생각해 볼 것(과정 지향적)’

을 주문했고,

두 번째 그룹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공 가능성을

 0~100점까지 매겨볼 것’(성공 지향적)

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두 그룹의 주문을

서로 바꿔서 풀도록 했습니다.
어느 쪽이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더 크게 생각했을까요?

첫째 그룹이었습니다.

과정을 먼저 생각하면서

성공 가능성을 높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의 가능성만을 따졌던

둘째 그룹은 대부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즉, 성공 지향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 가능성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일단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집중해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힘도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자신의 헛된 맹세로 인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되지요.

(마태 14,1-12 참조)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맹세를 지키는 것에만

생각했기에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왕이라는 위치였기 때문에 분명히

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느냐 마느냐만 따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속담처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런 세상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행복보다는 결과의

행복을 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로데와 마찬가지로

후회와 함께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주님과 우리 모두 함께

누리는 그 행복을 좇아서

생활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

(에피쿠로스)

(서울대신학교 성당 앞의 순교자 부조)


나보란 듯 사는 삶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우리입니다.

내 말을 그리고 내 행동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면서 망설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곧 나 자신의 자존감과 연관이

되어서 자존감 상실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든다면 한 번

이 점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내가 눈치를 보는 그 사람이

나의 이런 모습을 요구했을까?

자존감을 내세우지

말라고 이야기했는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남보란 듯 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나보란 듯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국 성지순례 중인 순례자 분이 주고 가신

말씀 사탕. 꼭 완주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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