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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9.2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27 조회수1,433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하까 1,15ㄴ―2,9

15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이었다.

 2,1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에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2 “너는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백성에게 말하여라.

3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
4 그러나 즈루빠벨아,

이제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6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7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은도 나의 것, 금도 나의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9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복음 루카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가본 친구 집인데 글쎄

중국집입니다. 더군다나

어머니께서는 친구가 놀러 왔다고

자장면까지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장면이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장면

먹은 티를 내려고 일부러 입가에 묻은

자장을 지우지 않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장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이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는 왜 중국집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신 거야?’

라면서 어린 마음에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탈이 난 것입니다.

 배가 계속 아파 왔고 수없이

화장실을 다녀와야만 했습니다.

한동안 자장면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장면을 먹으면 또 배가 아프고

고생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중국집 아들

친구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으면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나는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은

절대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취향이 바뀌는 것처럼 부러움의

 대상도 계속 바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변하고

없어질 수 있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더불어 없는 것에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시지요. 군중의 생각이 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물었던 것이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군중들은 그 누구도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보여 주신 놀라운 기적을 보면

충분히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그런

고백은 하나도 없었을까요?
군중들은 진짜 주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만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뛰어넘은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예수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위대한 인물에게는

목표가 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워싱턴 어빙)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신자 중에 저의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 달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갑곶성지 대표 전화 번호가 있지만,

저와 직접 연락할 수 없으니 번호를

요구하는 것이겠지요.

휴대전화 번호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요구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번호를 알려주고 나면

곤란한 일들이 밀려듭니다.

아무 때나 전화가 오고

(밤 11시 넘어서

전화 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 시간에 저는 꿈나라에 있습니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뒤에

확인하지 않는다

(워낙 잘 보지 않습니다)

고 불평도 하십니다. 
그래서 제 번호를

잘 공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무실에서 상대방의

번호를 물어보고,

제가 직접 전화를 거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물론 이때 쓰는 전화는 단순히

통화만 할 수 있는 옛날 전화입니다.

카카오톡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통화하고 난 뒤에는 그냥 전원을

꺼버리기 때문에 상대방이 이 번호를

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저는 그저 ‘한 사람’일

뿐이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이 ‘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게

특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번호를 물어보고

만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가 종종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저의 고충을 조금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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