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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9.2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29 조회수1,87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 아모 6,1ㄱㄴ.4-7

전능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4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5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6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7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제2독서 1티모 6,11ㄱㄷ-16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루카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차르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모차르트를 느끼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연 모차르트는 후대 사람들이

 사는 21세기에 자신의 음악을

연호하면서 자신의 생가까지

방문할 것을 예상했을까요?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딴 모차르트

초콜릿까지 만들어서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해줄 것을 알았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그저 매일 곡을 쓰고

연주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오직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들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호칭까지 얻게 했던 것이지요.
지금의 자리에서 충실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굳이 먼 미래에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될 것을

예상하고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묵묵히 행동했을 때,

세상은 이를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충실이 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라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세상은

좋은 기억을 남기지 않습니다.

나쁜 기억으로 기억되던지 어쩌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종기투성이의

라자로를 매정하게 쫓아내지 않았으며,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형제들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는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부자라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 고통받는 라자로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는데도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것입니다.

사실 죽어서도 정신이 차리지 못하지요.

벌을 받고 있는데도 자기를 라자로에게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지 않고

라자로를 자기에게 보내시라고

아브라함에 부탁합니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이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부자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 가난한 라자로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난한 라자로의

이름만을 밝힙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고 있던 사람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내 자리에서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충실은 욕심을 채우는

 충실이 아닙니다.

그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충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충실,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나눔을 실천하는 충실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완벽함이란 더이상 보낼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

(쌩텍쥐페리)

(레안드로 바사노의 '부자와 라자로')


질문하십시오.

강화에는 맛있는

 식빵을 만드는 카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나면 이 카페에 가서

 식빵을 사 오곤 합니다.

 며칠 전, 신학교 강의를 마치고

성지로 돌아오는데 이 카페의 식빵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페에

 가서 식빵 3개를 사서 다시 성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봉투 안에

식빵의 숫자가 다릅니다.

3개가 아니라 2개인 것입니다.

차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꼼꼼히

찾아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다시 카페까지 30분을 운전해서

간다는 것도 힘들고, 가더라도

카페에서 3개를 담아서 줬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빵 하나 그냥 손해

봤다고 생각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후에 이 카페에 다시 가는 것이

힘들 것만 같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30분 전에 식빵

3개를 사 간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봉투에 두 개만 담겨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조금도 화내지 않고,

이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가져온 저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혹시 제 말이 맞는지 봉투에

담았던 직원에게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잠시 뒤에 식빵을 담은 직원의

실수였다면서 가능하면 다시 카페에

와서 가져가라고 하더군요.
여기서 다시 부탁했습니다.

왕복 한 시간 동안 식빵 하나 가지러

 가기가 힘들다고 말씀드리면서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 계좌번호를 묻더군요.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고

잘 해결했습니다.

만약 전화하지 않았다면 손해를

그냥 안고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 한 통화로 잘 해결된 것은

 물론이고 그렇게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계속 이 집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안 될 거야. 증거도 없잖아.

시간 낭비야.’라는 결론을

내버리면 손해만 안게 됩니다.

그러나 정중히 전화를 걸어

 질문하자 많은 부분에서

이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에 그냥 결론을

내버리고 포기합니다.

그리고 좌절의 시간을 보내지요.

그러나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시도를 통해 또 다른

체험과 함께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지레짐작보다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대천사 대축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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