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도신경열세번째/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12 조회수1,086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열세번째(2019.10.12)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히브리서 13)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대 제사장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재물로 하여 하느님 아버지가 기뻐 받으실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게 십자가죠 그리고는 영원한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어요 히브리서 9장에 보면 그게 승천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이땅에서의 임무를 마치시고 하늘 지성소로 자리를 옮기셨어요. 그렇다면 인성을 입고 신성을 가지신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신데 거기서 지금 뭘 하고 계시냐구요 혹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당신 백성들이 살 천국 맨션을 열심히 건축하고 계신 걸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하늘 지성소로 올라가서 전능하신 하느님 右便에 앉아 계신다 그래요 보좌 오른편에 가만히 앉아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경하고 계신 걸까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135절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말씀과 하느님 오른편에 육신을 갖고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에 개괄적인 의미파악부터 해보죠.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손과 발 등에 신체부위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요. 하느님은 자신을 개별화하기 위해 어떤 물질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닌 거에요 그런 분이 어디에 앉아 계신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죠 신체 부위가 없는데 어디를 대고 앉아요 그럼에도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앉아 계신다라는 표현이 여러번 등장해요 하느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 그건 신인 동형론적 표현법이라 그래요 하느님을 인간에 비유하여 표현을 해서 우리로 하여금 사태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히브리 문학의 표현기법이에요 예를 들어서 하느님에 손 그러면 우리는 주권으로 이해를 하고, 하느님의 얼굴 그러면 사랑으로 이해를 한단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라는 표현은 인간 세상에 왕이 그의 보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듯이 하느님께서는 온 땅에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라는 표현인 거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라는 것은 한마디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통치와 권세를 나타내는 말이에요 이해가 가시죠

10319절 보세요 19 주님께서는 하늘에 당신 어좌를 든든히 세우시고 그분의 왕권은 만물을 다스리신다.

이 말인 거에요 이렇게 보좌에 앉으신 하느님은 만유를 그분의 권세로 통치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인 거에요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승천하셔서 그 하느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 또한 신인 동형론적 표현인 거에요 예수님이 지금 전능하신 하느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에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른편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해야 됩니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우편은 항상 바른 편 옳은 편을 의미해요 그래서 右便을 바른쪽 오른쪽 이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고대시대 때부터 누군가를 최고의 예우로 우대 할때 왕에 우편에 앉게 한거에요. 열왕기상 219절에 보면 솔로몬이 어머니 바쎄바가 처소로 들어오자 왕의 신분인 자신의 오른편자리를 내 드리죠 그러니까 왕의 오른편 자리는 왕이 소유하고 있는 권능과 영예를 함께 누리는 자를 말하는 거에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금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셔서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에 겪었던 약함과 수난과 죽음의 삶에 對蹠點에서 하느님에 권능과 하느님에 명예를 회복하시고 하느님으로서 통치를 하고 있다라는 이야기인 거에요

필리비서 29절을 보세요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게 보좌 오른편에 앉아 있는 상태인 거에요 그렇다면 이제 하늘과 땅을 권능으로 통치하고 계신 전능하신 하느님 右便에서 하늘과 땅을 권능으로 통치하고 계신 진정한 萬有(우주에 존재하는온갓 것)를 차치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되겠죠

시편 1101절 보세요 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중요한 구절이에요 하느님께서 예수에게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언제까지 원수를 발판으로 삼게 할때까지, 그러니까 원수의 머리를 완전히 밟아 뭉갤 때 까지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서 뭐하고 있는 거에요 십자가에서 이미 밟아 버린 원수의 발을 가시적으로 밟아 내는 일을 하고 계시는 거에요 2-7절 보세요 2 주님께서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으로부터 뻗쳐 주시리니 당신께서는 원수들 가운데에서 다스리소서. 3 당신 진군의 날에 당신 백성이 자원하리이다. 거룩한 치장 속에 새벽의 품에서부터 젊음의 이슬이 당신의 것. 4 주님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5 주님께서 당신의 오른쪽에 계시어 진노의 날에 임금들을 쳐부수시리이다. 6 그분께서 민족들을 심판하시어 온통 주검들로 채우시고 넓은 들 위에서 머리를 쳐부수시리이다. 7 그분께서는 길가 시내에서 물을 마시고 머리를 치켜드시리이다.

원수들 가운데에서 다스려요 원수 싹 쓸어 버리면 안되요 그런데 원수들 가운데에서 다스리소서. 그래요 어디서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두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요 예수님은 지금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원수의 머리를 완전히 밟으실 때까지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세요 그 말은 다른 말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원수의 머리를 밟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인데요 이 시편 110편을 예수님께서 마르코복음 12장에서 그대로 인용하시죠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여기에서 주님께서 내 주님께 라는 말을 70인 역에서 그렇게 번역했다 말이에요 큐리오스가 큐리오스에게 야훼 하느님이 야훼 하느님에게 이 말도 마찬가지에요 야훼 하느님이 내 야훼 하느님께 라고 지금 1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죠? 예수님도 야훼 하느님이라는 말이에요 지금 하느님의 권능의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이 야훼 하느님에 권능으로 지금 생존해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의 보좌에 앉으셔서 하느님의 권세로 원수에 머리를 밟고 계시는 거에요 그리고 두번째로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원수들 까지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가 다스리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예수가 마귀와 싸우고 있는 거 아닙니다 마귀는 상대가 안되요 피조물인데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와 싸워요 그러니까 조금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하느님은 창세기 315절에서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라는 원시 복음을 주셨어요 그 언약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원수에 머리를 밟으셨어요 거기서 승리를 하신 거잖아요 그런데 그 승리는 영적인 승리에요 어레디. 이제 승리 안에 들어온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 승리의 십자가가 이해가 되고 적용이 되고 가시적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새하늘과 새땅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 나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데 육신을 입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스스로의 자아 안에서 조차 그 싸움을 버거워하며 싸우고 있는 거에요 여전히 자기 안에서도 자기에게 지고 있어, 자기 옛사람에게 지고 있단 말입니다. 머리를 밟았는데 그 밟힌 머리에게 늘 당하고 있는 거에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이 이미 밟아 놓은 원수의 머리를 밟기는 커녕 주님께 밟힌 그 머리에게 물려 있어요 주님은 하느님의 권능의 자리에 앉으셔서 바로 그 싸움을 돕고 계신거에요 아니라고 그건 이미 죽은 머리라고 복음을 믿으라고 제발 믿으라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이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제발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완전한 거룩으로 완성이 되라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돕고 계시는 거에요 그래서 2절에서 원수들 가운데에서 다스리소서가 등장하는 거에요 그 원수를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뭔가 지금 가르치고 계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원수는 지금 한시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거에요 예수와 싸우고 있는게 아니라. 성경은 때때로 지금 이 세상을 죄에 세력이 다스린다고 표현을 하죠 세상권세 잡은자 마귀잖아요 그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늘 위의 것들이나 땅위의 것들 모두가 예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거에요 필리비서 2장에서 우리가 봤잖아요 심지어 주님은 원수들도 통치하고 계신데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싶으셔서 죄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예수님에 통치아래에서 사용되고 있는 거에요

조직신학에서는 원수들까지 다스리시는 그 하느님의 통치를 권능에 통치라고 부르구요 그중에 들어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특별한 통치를 은혜의 통치라고 불러요 그래서 전자의 통치로 경륜이 되는 이 세상을 권능의 왕국이라 그래요 이거 다 다스리니까 이 전체 우주는 권능의 왕국이에요 그리고 그 중에서 특별한 은혜로 다스려지는 교회를 은혜의 왕국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권능의 통치로 일반은총으로 통치되고 있는 움직여지고 있는 이 세상속에서 특별히 은혜의 통치를 받아서 원수를 밟는 자리로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지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원수를 발판되게 하는거 즉 원수의 머리를 밟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를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자구요

지금 예수님께서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그 일을 올바로 규명하고 있지 않으면 지금 이 우주에 역사와 우리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어영부영 살게 되는 거에요 목적도 없이. 그것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시 창세기 315절로 올라가야 됩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이 얘기 하는 거에요 이게 십자가에서 완성이 됬죠 이 구절이, 하느님께서 최초로 인류에게 주신 원시 복음이에요 여자의 후손을 보내서 원수에 머리를 박살내 버리고 마귀와 여자 여자는 누구다 교회 신랑이신 어린양과 혼인하는 교회 그 여자와 마귀를 죄를 원수되게 만드시겠다라는 그런 약속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망권세를 깨 버리심으로 그 원수의 머리를 밟으신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밟아 뭉게버리신 원수에 머리라는 걸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풀어서 설명하면 무엇이겠어요 그게 원수의 머리를 밟는게 창세기로 빨리 돌아가서 그 원수가 뭘 했는지를 떠올리시란 말이에요 그걸 밟는 거라 말이에요

창세기에서의 그 원수는 무엇을 조장하는 자였습니까?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들에 그 하나됨을 깨는 거였죠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분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피조물을 하느님의 자리로 밀어 올려놓고 하느님과 그들의 사랑에 관계를 깨버렸어요 그렇게 인간들에게서 하느님에 은혜가 떠나 버리자 인간들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그들의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죠 하느님 사랑에 쓰여져야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이 자기 사랑에 쓰이게 된 거에요 그걸 죄라고 하고 그걸 악이라고 하는 거에요 타락한 인간은 돈 명예 인기 쾌락 건강 가족 등을 나라는 존재에 범주에 복속시켜놓고 나로 만들어 놓고 그것들을 살찌우는 것으로 자신들에 만족과 행복을 삼으며 살게 됬어요 그게 세상이에요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살아요 100% . 하느님은 그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외곡된 사랑을 다시 당신께로 돌려놓으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렇게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 사랑의 대상들을 빼앗아 버리는 역사를 진행해가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 것이 우리의 죄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우리의 죄로 삼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러잖아요. 그 죄라는건 단순히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하고 살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에 그들에 마음을 두는 걸 이야기를 해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금식 기도까지 하며 하느님을 협박하여 얻어낼려고 하는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다 라는 것입니다 그걸 내가 체감하며 사는걸 신앙생활이라 하는 거에요. 비오로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걸 십자가라 그래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원수에 머리를 밟고 계신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야훼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말이겠죠 원수가 그거 못하게 한거니까 그런데 그 원수의 머리를 밟는다는건 다시 그 자리로 회복시킨다는거 아닙니까? 그말은 다른 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으로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끊어 내고 계신다는 말씀인 거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는 뭘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알고 있는 거에요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가 마음을 두고 있는 세상을 사뿐히 즈려 밟고 계신데 오늘날 교회는 주님이 밟고 계신 그 세상을 더 살찌워달라고 종교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는 거에요 교무금도 많이 내고 선교도 가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그래요 그거 얻어 낼려고,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는 자로 타락을 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사랑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부자되게 해주세요 병고쳐주세요 소원들어주세요 문제해결해주세요 번영하게 해주세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죄라니깐요 거기에서 벗어나서 하느님께 눈을 돌리는게 바로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왕이요 제사장이요 예언자로 오셨던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 나라에서 왕이요 제사장이요 예언자의 직분을 갖고 하느님에 권세로 우리를 돕고 계신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 인생에서 그렇게 여러분이 하느님 말고 사랑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거에요 누구 때문에 하늘에서 왕으로 제사장으로 예언자로 여러분을 돕고 있는 바로 그 분 때문에 그러면 그런 것들이 떨어져 나갈때 우리는 하느님께로 눈을 돌려야 되는데 우리는 도리어 하느님을 더 미워해 버리죠. 이딴 것도 하나 못도와주는 그런 하느님, 우리가 교회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오히려 우리는 모욕하고 있잖아요.

히브리서 1011-13절 보세요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나오죠 하느님 우편에서, 하느님이 뭐하고 계세요 원수 머리 짓밟고 계시단 말입니다 원수 머리 짓밟는건 뭐다 당신의 백성들이 하느님 말고 사랑하고 있는 것들 밟아 뭉게서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달픈 거에요 왜 여전히 내 육신이 이땅만 바라보고 있는데 하느님이 권능의 철장으로 그걸 지금 끊어내고 계시니까.

히브리서 724절 보십시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지금 제사장으로 항상 살아서 뭐한다 그래요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신다. 그래요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예수가 지금 우리를 위해 뭘 하고 계신다 그래요 우리를 기도하고 계신다는 거에요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다라는 뜻이에요 우리 거룩과 하느님 백성으로의 완성을 위해 그분이 기도를 하고 계시는 거에요 우리를 하느님에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시켜 달라고 하느님만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거에요 그런데 그분은 하느님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이 기도하시는 것은 하느님에 뜻이라는 것이죠 하느님에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말고 사랑하고 있는 것들을 전부 똥처럼 여기게 되요 반드시. 얼마나 우리의 삶에 간섭하는지 몰라요 잘못가는 꼴을 못보셔 잠도 안주무시고 우리를 쫓아다니세요.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이 자꾸 내게서 멀어져가는 일만 생겨요 반면에 예수님의 기도에서 제외된 자들은 자기들 내키는 대로 자기들 뜻대로 이 세상 것들로 만족하며 행복해하며 즐겁게 살아요 그것이 얻어지면 행복해요 그들은 그게 시편 73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속에 들어있는 이들이 어떻게 살게되는지 로마서로 가서 확인해 드릴께요

로마서 834-39절 보세요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여전히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칼 종일 주님을 위해 죽음을 당하게 되는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요 우리는 기대하기를 그런걸 다 막아주고 이땅에서도 우리의 소원과 야망을 모두 이루어 내며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 그런 기도를 하실 것이다 라고 배워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한 것이 닥쳤을 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만으로 그러한 것을 넉넉히 견뎌내게 이겨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 가난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으로만 행복할 수 있는지 그를 그렇게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는 거에요 병이 걸렸을때 얘 병좀 빨리 고쳐서 빨리 건강하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세요 가 아니라 그 병속에서도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그 성숙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완성시켜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는 거에요 여러분의 기도가 그 기도를 쫓아가야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게 이 세상 사람들은 그런게 우리에게 닥쳤을 때에 그걸 하느님의 저주로 착각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진짜 하느님의 보좌 우편에서 일을 하고 나타내보라고 증인으로 한번 드러내 보라고 우리에게 그런 상황을 허락해 주시는데 그 상황을 빨리 바꿔달라고 내 뜻대로 바꿔달라고 기도들을 하고 있다니깐요

두번째로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주세요 그건 뭐죠 예언자잖아요 예언자 직분 주님의 하늘에서의 예언자 직분이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는 거에요 그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죠 성령이잖아요 그리스도의 영 주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보좌 우편의 일을 우리 안에 실행하고 계시는 거에요

요한복음 1426절 보세요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계시해주시는 하느님 말씀에 구체적 세목이 뭐에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야 너희들 그렇게 계속 죄에 머물다가는 죄가 머라 그랬어요 하느님 말고 딴 것에 마음두고 거기에서 행복 찾을려고 하다가는 너희들 심판 받는다 의가 준비됬으니 의를 꼭 붙들어라 이거 세개 가르쳐 준거에요 자기 부인하라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세상것으로 행복할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거두라는 것입니다 잘 안되죠 그래서 하느님이 예언자로 지금도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거에요. 성경을 통하여 그걸 돕고 계시는 거에요 보좌 우편에서 마지막 남은게 왕직분이에요 예수님의 왕의 직분은 무엇을 위한 직분인지 한번 보자구요

고린도전서 1525절 보세요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죽음 그 죄에 근원을 밟아 뭉게기 위해 지금 왕노릇 하신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하느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머리로 교회의 왕으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 교회를 다스리고 계세요 그런데 그분의 통치가 원수에 머리를 밟고 사망을 멸망시키기 위한 통치란 말입니다 원수는 뭐에요 니가 왕이야 왜 하느님께 순종을 하니 마음대로 살어. 니가 스스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니까 그게 마귀잖아요 그게 원수잖아요 그걸 밟는 거에요 교만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왕으로 통치하고 계시는 거에요 그럼 제사장 왕 예언자로서의 예수님이 지금 뭐하고 계신다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이 세상것으로 나를 자랑할려고 하고 내가 이 세상것으로 행복해하려고 만족해 하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들을 끊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삶 속에서 그런 것들이 지금 조금씩 끊어져 나가는 거에요

 

많은 분들이 왜 하느님이 나를 도와주지 안냐고 나를 왜 이대로 두고 보시냐고 왜 내 병 안고쳐 주냐고 왜 나 이렇게 가난하게 만들었냐고 저한테 따지는데 왜 저한테 따지세요?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왜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그게 신인동형론적 또 다른 표현중에 하나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냐 말이에요 더 미워하고 있잖아요 하느님을, 그들을 불신자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이 왕으로서 완성하신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성도들에게 이해시키시고 적용시켜서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서 하느님만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키는 왕이요 제사장이요 예언자의 일을 하고 계신 거에요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이 됐어요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권능의 도우심을 받아 이루어 내야 할 것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깨달아 자기를 부인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그분만을 나의 힘으로 여기며 사는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거에요.

서서히 거기에 질병이 쓰일 수 있고 파산이 쓰일 수 있고 이혼이 쓰일 수 있고 가난이 쓰일 수 있고 사고가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걸 저주로 매도하지 마세요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만 사랑하는 자로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로 성숙이 되고 완성이 되어야 되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선 것입니다 그 모든 구속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책이 성경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서, 신약의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다 주 너의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게 유일한 목적이라니깐요 이 우주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이며 교회가 지금 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마태복음 2236-40절 보세요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첫째와 둘째는 구별이 없는 동등한 것이라는 이야기에요 어떤게 우위에 있고 어떤게 하위에 있는 것이다라는 그런 말이아니에요 둘째라는건 그와 같으니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와는 다른말로 첫째의 사랑이 회복되면 둘째의 그 사랑은 필연적이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는 말도 되는 거에요 둘은 뗄래야 뗄수 없는 거라는 거에요 같은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곳에서는 이웃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하는 거고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 사랑이 율법의 정수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둘은 같은거니까 둘은 따로 떨어질 수가 없어요 앞의 것이 파괴되면 뒤엣게 파괴게 되고 앞엣게 회복이 되면 뒤엣게 회복이 되요

로마서 138-10절 보세요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율법이라 그러죠 율법의 그 내용을 요약하고 꽊꽉 짜서 요만하케 만들면 사랑이라는 거에요 하느님 사랑 그리고 그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을 격발해 낸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사랑해라 그 쉐마는 어디에서 인용이 된거죠?

신명기 6장 신명기 64절과 5절만 볼께요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게 쉐마에요 유대인들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에게 한 명령중에 신명기 64절에서 9절까지 의 내용을 쉐마로 받아서 격문에 차고 다녔어요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이야기 하시죠 저놈들은 차는 격문만 크게 해가지고 다녀 그러시죠 그 격문에 넣고 다녔던게 이 쉐마라 말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그들은 이 쉐마를 암송했어요 손톱에 까지 써가지고 다녔어요 쉐마라는 말은 신명기 64절의 첫단어에요 쉐마로 시작한단 말입니다 그 단어의 의미는 듣고 순종하라란 뜻이에요 들어라 순종하라 쉐마 하느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만 사랑해라라는 거에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들아 너희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만 사랑해야지, 하느님을 99% 사랑하고 1%를 돈이나 자식이나 명예에 줘서는 안된다라는 뜻이에요 그게 다하고에요 그런데 그게 안되니까 직접 예수님이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그 권능의 철장을 갖고 우리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그걸 누가 쉽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걸 순교라고 까지 이야기 하는 거에요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십자가로 붙들게 되어 있어요 자동적으로 하느님 밖에 없군요 당신 십자가로 숨는것 이외에 행복은 우리에게 올수가 없군요를 배우게 된다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때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격발되는게 이웃사랑이에요 왜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은 나 자신만 사랑했던 여러가지 이 세상의 힘들 관계들 이런 것들로 부터 벗어나 하느님에게 눈을 돌렸다 라는 거니까 나에 대한 사랑을 거둔 사람은 당연히 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거에요 근데 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라고 그래요 니 몸처럼 사랑하래요 이게 문제인 겁니다 죽었다 깨나도 안되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래면 내가 오늘 고기 먹었으면요 내 이웃에게 고기 갖다 줘야 되요 내가 오늘 백불 썼으면 내 이웃도 백불을 쓸 수 있게 해줘야 되요 그게 내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그게 됩니까 안되잖아요 그런데 왜 그게 안돼냐고 궁금해 하는 이들이 없어요 신앙생활은 그냥 대충 대충 설렁 설렁 해도 되는 걸로 알고 있는 거죠 안되잖아요 심지어 자기 자식도 그렇게 사랑 못해요 자기 부모도 그렇게 못사랑합니다.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는 이 성경의 이 명령은 도대체 뭐냐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격발이 되는 이웃사랑은 무엇을 전제로 나와야 하는 거에요? 하느님 사랑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럼 간디나 슈바이져가 한 사랑은 사랑 아닌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아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해라라고 한 그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은 간디나 슈바이쳐 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저마다 그 사랑을 원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쉐마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서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이들에게만 운명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명령이에요 에돔사람에게 그런 명령 안했어요 애굽사람에게 그런 명령 안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얘기 안했어요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은 누굽니까? 하느님의 은혜로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한 신앙을 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웃사랑은 그 안에서만 유효한 거에요 그렇잖아요 쉐마가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거니까 이웃을 정확히 여러분이 규명하고 계셔야 된다 말이에요.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라는 율법의 명령은 하느님 나라 안에 속한 이들 간에 사랑을 말하는 거에요 니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에서의 그 몸이 뭐겠어요 한번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다 동원해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아 니가 지금 어떤 몸이 되어 있는데 니 이웃이 니가 되어 있는 그 몸에 일부라는 걸 너는 아니 그렇다면 니가 니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도 너에게 쏟아 부어진 똑같은 은혜로 몸이 되었으므로 니가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라는 것을 아는 그 믿음과 그 감격으로 이들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어?라고 묻는 거에요 그게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렇게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러한 이 세상적인 사랑이 안나오고 있는지 잘 아시겠죠 사랑이 무엇인지 조차 규명을 못하고 있는 거에요 이 세대에는요 그러니까 여러분 너무 낙담할 필요 없어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놓으라고 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 아닙니다

로마서 124-5절보세요 4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5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이 몸인 거에요 이몸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해라 이 몸인 거에요 이 육신처럼 사랑해라 라는게 아니라

로마서 1013-14절 보세요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만 그렇게 한 몸이 된 그 내 이웃을 내 몸으로 여기게 되는 거에요 그게 사랑인 거에요 우리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를 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있는 성도가 맞다면 우리가 함께 한 믿음 안에서 한 길을 가고 있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한 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되고 그 한몸인 교회는 바로 내 몸이니까 자연스럽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는 거에요 지금 예수가 머리로 우리에 교회에 머리가 되셔서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지금 한 몸으로 끌어 안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건 이제 우리가 열심을 내서 이루어 내야 하는 계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내신 은혜와 축복에 현실인 거에요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해라 라는건 우리에게 주어진 부담가는 명령이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사랑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예수를 시켜서 너희들은 그렇게 도저히 사랑 못하니까 내가 너희를 그냥 한 몸으로 만들어 줘 버릴거야 그래서 너희들은 그냥 서로 한 몸으로서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버릴거야 은혜와 축복의 선언인 거에요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을 성경에서 읽을때 여러분은 감사하고 감격하셔야지 절망하시면 안되요 난 왜 안되는가 안되기 때문에 하느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니가 밥 한그릇 먹으면 이웃에게도 밥 한그릇 가져다 주고 니가 국 한그릇 먹었으면 이웃에게도 국 먹게 해줘라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아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너희가 정말 안다면 그걸 한번 내놔봐라는 요구인거에요. 아직도 선명하지 않죠? 성경은 분명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그래요 그건 나를 사랑함이 전제가 된다는 말인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면 안된다고 배웠잖아요 그러면 니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에서의 자기사랑은 도대체 뭘까요 그것부터 규명하고 있어여죠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을 얻게 되면 그렇게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를 믿음안에서 경험하게 되요 아주 가끔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이 옛자아 안에 들어있는 나에게 실망하는데에 쓰여지는데 아주 가끔 그 예수님의 은혜를 새롭게 창조된 나를 경험하게 되요 그걸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그때에 우리가 믿음안에서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 나를 인식하게 될때 그 구원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죠 예수님 아니였으면 큰일날뻔 했구나 그 소중함과 그 감격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를 사랑하는 거에요 야 나는 이렇게 살다가 지옥갈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의 은혜로 나는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너무 감사하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를 사랑하는 거에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는 건 뭘까요 저 인간도 똑같은 인간인데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였으면 그냥 지옥에 갈 인간인데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거구나 그러니까 교회안에서 거들먹거리는 사람 앞에서 주눅들 필요도 없고 저사람도 저렇게 못나고 못생기고 못배우고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이 나와 똑같은 은혜로 구원을 해 주셨다고 하니까 저도 존귀한 이구나라고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조건이나 상황이나 자격이나 소유나 이런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것 그것이 니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어요 못하죠. 자기가 어떻게 사랑을 받았는지를 모르는데 그 사랑으로 어떻게 다른 이를 바라봅니까 그러니까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어떤 책에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이고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에요 잘 이해하셔야죠

그렇게 같은 운명 공동체 안에서 한길을 가고 있는 한 몸으로서의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은 그 공동체에 구성인인 그 자기 이웃을 절대로 이 세상 잣대로 판단하여 평가하지 않아요 여전히 교회안에서도 자기의 인기를 위해 자기의 자랑을 위해 자기를 또 들어내고 싶어서 남을 여전히 모함하고 폄하하고 뒤에서 수근대고 하는 그런 이들은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거에요 아니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사랑과 그 구원에 핵심을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한 성도는 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네 이웃이 하느님의 은혜 밖으로 자꾸 도망쳐 나가서 이 세상 것들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전념할때 그들이 그 하느님의 사랑에서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자꾸 딴데 눈을 두지 않도록 가르치고 훈계하고 기도하고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바로 잡아줘야 되요 그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거에요 네 이웃을 오직 하느님의 사랑 안에만 거하도록 붙들어 주는 거에요 돈 명예 취미 건강 가족 등등 네 이웃이 그런 것에 전념하느라 하느님의 사랑을 자꾸 놓치고 있을때 그냥 두고보는 건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서 엉뚱한 것들을 바라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못된 습관들을 향해 칼을 던져 도려내버리는 것 그것이 내몸처럼 사랑하는 거에요 니 이웃을 그래서 사랑은 친절과는 다른 것입니다 친절은 사랑에 증상일 수 있지만 사랑과 동의어는 아니에요 그래서 사랑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수도 있어요 하느님의 사랑안에 내 이웃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때때로 나의 존재가 그들에게 날카로운 메스로 여겨질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내가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에 이 세상에 힘이 아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만을 사랑하는 새로운 내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내 이웃 또한 내몸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러브는 라이크와 다른 거에요 그래서 사랑은 언약적 사랑이며 의지적 사랑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의지적 사랑을 시도하는 과정속에서도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미운사람 떡하나 더갖다 주면서 마음속으로는 확 체해서 뒈져 버려라 이런 마음을 갖고 가는 것처럼 거기서 그걸 폭로 당하면서 나는 왜 예수에 십자가를 붙들 수 밖에 없는가를 배우란 말이에요 그렇게 내가 점점 부인이 될때 내 안에 사시는 예수의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건너 뛰고 내가 사랑해 보겠다고 애들을 쓰니까 계속 자기에게 실망만 하는 거에요 절망만 하는 거에요 안되는구나 나는 사랑할 수 없어요 하느님 앞에 인정하세요 그러나 십자가를 꼭 붙드세요 붙들자 마자 우리안에 들어오는 하느님의 쉐마, 너는 인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됐어 예수가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만들었어 니 이웃 너와 한 몸들이야 그래서 사랑 안하면 안되게 됐어 인제 그때 여러분 우리 안에서 나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거고 나는 하느님을 붙들게 되고 그때 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웃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의지적 사랑을 많이 해봐야 되요

그런데 그게 안된다고 절망하지 말란 말입니다 절망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그때 하느님의 십자가를 꽉 붙드세요 주님 주님이 저는 사랑할 수 있는자가 됐다라고 하는데 왜 저는 여전히 이 모양입니까 기도는 그 기도를 하는 거에요 돈벌게 해주세요 자식 좋은대학 가게 해주세요 병고쳐주세요 뭐해주세요 이런 기도 할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처절하게 실패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 그런거에 신경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거에요 하나느님만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거에요 여러분 믿음을 어따 써 먹습니까 그냥 끝까지 나는 사랑할 수 없는자에요 라고 인정을 했으면 그런데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까 나는 인제 사랑할 수 있어요 까지 가야 믿음인 거에요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거에요 그때에 집안에 비로소 칼이 들어나게 되요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예수를 올바로 믿지 않을때 나는 그들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앙을 복음을 열심히 이야기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들어나는건 뭐에요 그게 사랑이 아니라 칼이야 그런데 그게 사랑입니다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거에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세상속에서 하느님에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느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이 원수를 밟아 발판 되게 하시는 일이에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남아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샅샅이 훌터내고 계신다는 말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린 지금 점점 이 세상과 나라는 존재의 연장선상에 묶어둔 또 다른 나들을 기각당하고 부인당하는 중이에요 우리에 눈은 점점 하느님을 향하여 옮겨지고 있어요 나는 그런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그러한 새로운 나를 감사함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와 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 몸 내 이웃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오늘도 형식적 종교생활에 여념이 없을때에 나를 좀 인정해 달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만은 친절을 좀 배풀어달라고 투정을 부릴때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좀 해줘서 나를 좀 위로해주고 감동시켜달라고 땡깡을 부릴때에 미사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순서나 형식을 넣어서 나를 좀 울려달라고 고집을 피울때 우리가 어떻게 그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한다구요 가르치는 것입니다 훈계하는 거에요 야단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거에요 하느님에 사랑과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거에요 그게 진짜 사랑이에요 여러분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주어서 서로 서로 문제없이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그러한 가짜 사랑은 너무나 쉬워요 그거는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가장된 친절 아무나 할 수 있어요 하지 말라는거 아니에요 좀 친절해 지세요 그러나 지금은 좀 어색해 하고 낫설어 하며 심지어 거부감을 느끼며 왜 나에게 칼을 들이대느냐고 오해를 받는다 할 지라도 그가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하느님의 은혜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라는 사실을 감격속에서 깨닫고 하느님에 사랑에 감사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로 성숙되고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 그를 향해 쏟아 붇는 사랑은 정말 힘든 거에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게 순교에요 예수님에 십자가는 모든 이들에게 거부감을 줬구요 실망감을 줬고 오히려 그들의 모든 희망을 전부 꺾어 버린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그것만큼 큰 사랑이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달게 져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공부하세요 복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속에 하느님을 사랑하세요 예수님이 지금 보좌 우편에서 그 일을 돕고 계세요 그리고 그 하느님에 은혜와 사랑이 감사하거든 여러분에 이웃을 여러분의 몸처럼 사랑하십시오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죠?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