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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교회중심교리(26-3 한국 초기 선교활동의 특색)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12 조회수874 추천수0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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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국 순교자들의 선교활동
26-3 한국 초기 선교활동의 특색
그리스도 공동체의 사회의식를 토대로 하였습니다.
- 즉 정치적으로는 
 남인 소장파를 중심으로하고,
학벌로는 실학파와 이익의
학통을 잇는 근기학파였으며
사회적으로는
 권씨, 정씨, 이벽, 이승훈 등
인척관계가 얽힌 가학적 배경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며
적자, 서자, 양반, 천민,
남. 여. 빈. 부의 차별대우를
지양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한 새 가치관을 수립하는 
 사회집단으로 변모,
확대되었다고 봅니다.
   지하 교회적 활동이었습니다.
 - 유교적 집권의 세력하에서
천주교는 도전적 체계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게 되었으므로
 지하 교회의 활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의 선교는
생명을 건 혼신적인
용감한 활동이었습니다.
  문서로, 노래로, 구두로,
권면과 표양으로 한국교회의
 초기는 이렇게 선교되었습니다. 
 평신도 활동이었습니다.
- 성직자가 없었던 시기가 더 많았고,
 있어도 드러내고 활동하지 못했던
시기가 대부분 이었으므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평신자들 
 자신이 교회를 지키고 육성하였으며
신앙을 굳혀가는
교회로 발전시켰습니다. 
점조직 활동이었습니다.
-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점조직을 이루고 비밀리에
친지를 찾아 전교를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철저한 신앙 실천자
10 명 내외를 뽑아 지도자로
활동하도록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이 회원의 신앙생활을
 관리하는 한편, 전교의 책임도
 맡게 하였으며, 모든 회는
 직접 신부와 연결되게 조직하여
  비밀이 유지되도록 운영하였습니다. 
선교활동은 전국적 활동이었습니다.
- 시작은 시울이었고, 
 곧 이어 이존창이 내포 지방에,
유항검이 전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여 신유박해 때는
 이 두 지방만 하여도 신자들이
1 만명에 달했었다고 합니다. 
 심한 박해를 피하여 전국으로
 흩어졌으며 심산으로
숨어 들어간 신자들이
  경기도 야산지대, 강원도,
충청북도 심산지역,
충남의 야산지대,
태백산 유곡, 진안의 고원지내,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심산지대로 퍼져 흩어졌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굽고, 산림에 의지하며
살았던 고달픈 생활이었으나,
이 안에서 신앙의 격려를 평신도
 지도자들이 불태워 주었습니다.
진취적 선교활동이 었습니다.
 - 한분의 목자도 없이 교회를
창설하여 가까스로 모신
신부님이 순교한 후 북경 교구의
 사정으로 사제파견이 어려워지자
지도자 정하상, 유진길은
천주교의 수위권자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쇄국 조선왕조 밑에서
이러한 외교 청원이 취해졌다는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용기였습니다. 이런 감탄할
탄원이 북경교회의 도움과
마카오 주재 교황청 동양
경리부의 배려로 교황청과
이어졌고, 1831년 9월 9일
드디어 새 역사를 맞는 조선교구
설정이라는 결정이
교황청으로부터 내려졌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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