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도신경 열네번째/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13 조회수1,276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사도신경 열네번째 (2019.10.13)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1베드 4.5-6)

(1베드 4.5-6)

5 그들은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심판하시려고 준비를 갖추신 분께 셈을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6 그래서 죽은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들이 육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심판을 받았지만, 영으로는 하느님처럼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010이란 영화가 개봉이 됐죠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영화는 자연재해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다룬 아주 무서운 영화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현대판 노아의 방주와 같은 그런 영화에요 컴퓨터 그래픽 효과가 엄청나게 사용이 된 그런 영화여서 그런지 지진이나 해일 등으로 땅이 내려앉고 바다가 요동을 치는 그런 장면들에서는 정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실감이 나요 이런 인류 멸망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나올때마다 은근히 기대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영화를 보면서 인류의 마지막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을 갖고 너무 현실에만 얽매어 있는 자신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뒤돌아보면서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미미하게나마 가지게 되면 참 좋겠다는 그런 기대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런 무시무시한 인류의 종말을 영화로 보면서도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요 그건 그냥 영화일 뿐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거죠 아니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조차도 하느님에 심판의 날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관심을 두고 살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참 심난합니다. 그냥 이세상이 다 인것처럼 살아가고 있잖아요 성경은 분명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때에는 무시무시한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반복하여 명확하게 밝히고 있어요

(히브리서 926-28)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이건 다 알죠 누구나 죽습니다.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런데 이건 별로 인정하지 않아요

(2티모 41) 1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하느님 앞과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예수는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분입니다

(2데살16-8) 6 하느님께서는 정녕 의로우시어, 여러분에게 환난을 겪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겪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같이 안식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주 예수님께서 능력을 지닌 당신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이루어질 터인데, 8 그때에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오시어,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붙들지 못한 이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은 올리브동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죠 그 자리에 있던 천사가 예수님의 승천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한말 기억나십니까? 볼까요

(사도행전 110-11)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모두가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하느님에 영광 즉 구름속으로 들어가신 것처럼 다시 공개적으로 오실 것이다 라는 말씀인 거에요 여기서 구름은 손오공의 근두운같은 그런 구룸 아니라 그랬어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러한 말씀을 하신적이 있죠

(마태복음 2430)30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볼 것이다. 31 그리고 그는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가 선택한 이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에요 그러니까 심판을 위한 예수님의 재림은 단 한번 공개적으로 세상 모든 민족들이 볼 수 있게 오신다는 거에요 어떻게 여러분 지금 우리 미사예배가 인터넷으로 방송이 되면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거 아시죠 어떻게 라는 질문 같은거 하지 마세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자들의 말처럼 종말에 예수님의 은밀한 재림이 한번 있고 그때 휴거가 되고 나중에 공개적인 재림이 또 있을 것이다 라는 이런 이중 재림설은 얼토당토한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게 예수님은 한번 오세요 그때 휴거는 딱 한번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미래에 어느날 공개적으로 이땅에 다시 내려오실 거에요 그렇다면 게으른 우리의 다급한 질문이 뭘까요 언제 오시냐는 겁니다 왜 평소에는 지맘대로 살아야 되거든요 그분이 오신다는 징조가 나타나면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미사예배하고 열심히 강의들을거거든요 그러니까 언제 오시냐 이게 궁금한 거에요 그러니까 영악한 제자들도 주님의 그날에 어떤 징조가 있을까를 물은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133-10) 3 예수님께서 성전 맞은쪽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아가 따로 예수님께 물었다. 4 “저희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첫번째 징조입니다)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7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두번째 징조입니다)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는 너희가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증언할 것이다. (세번째 징조입니다. 네 번째) 10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오겠다라는 것이죠

제자들이 예수님께 종말에 때에 나타날 징조를 묻자 예수님께서 4가지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잘 준비해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우리도 이 징조를 잘 공부해서 마지막 때에 낭패당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되겠죠 보시다시피 그 첫번째 징조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가짜 복음으로 미혹을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러한 일은 이미 예수님의 초림때 부터 있어왔던 일이죠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가짜 매시아가 출몰했고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도 초대교회때도 여전히 가짜 메시아 가짜 예언자들이 가짜 복음으로 교회를 미혹했어요 어디서 교회안에서, 여기 굿뉴스에서도.

(1요한 218) 18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말세는 초림때 부터 재림때까지라 그랬어요)

(1요한 41) 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자 적그리스도 거짓 예언자 그리스도인척 예언자인척 하는 이들이 절에 있을까요 이슬람 사원에 있을까요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늘 시험하라 라는 것입니다 시험하라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여 우리가 진짜 바로 가고 있는가를 반복하여 시험해보라는 거에요 여러분 정말 천국갈 자신 있으십니까? 사도 요한의 시대에 많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예안자들이 이미 교회를 미혹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후 그리스도교 역사 2000여년 동안 그러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를 미혹했습니다 작금에 성공주의 물질주의 번영의 신학등이 그러한 것이고 신비주의 자유주의 자연주의 다원주의 등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번째 징조로는 우리가 주님의 재림의 때를 추측하여 간음해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죠 왜 계속해서 그런 인간들이 나왔는데 그걸 어떻게 징조로 볼 수 있어요

두번째 징조를 볼까요 (마르코복음 136-8)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7 그리고 너희는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불안해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아직 끝은 아니다. 8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곳곳에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통의 시작일 따름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날에 관한 두번째 징조는 전쟁과 지진과 기근이에요 쉽게 말해서 전쟁과 자연재해와 극한에 이기주의로 인한 약자들의 굶주림입니다. 기근 그러나 그러한 전쟁과 자연재해도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어왔던 거에요 그 전에도 있었고 지난 3천년 동안 역사서에 기록된 공식적 전쟁만 몇회인줄 아세요? 33백회 작은 국지전까지 합치면 셀수도 없어요. 우리는 전쟁속에서 살아온 거에요 인간들은 매년 각기 다른 커다란 전쟁을 치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지진 해일 가믐 전염병등에 재난도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부터 있어 왔던 것들이에요 따라서 두번째 것도 징조로 사용할 수 없어요 심판의 날을 가늠할 수 있는 징조로 사용할 수 없어요 늘 있어왔던 거니까

세번째 징조를 한번 볼까요 성도들의 고난입니다 마르코복음 13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는 너희가 매를 맞을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증언할 것이다. 성도들의 고난도 인류 내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왔던 거에요

(히브리서 1135-38)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이 위에 누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죠?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 그들이 이미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도 이런 고난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너희들만 고난 받는 거라고 착각하지마라고 이야기 한거 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번째 징조도 마지막 때를 가늠할 수 있는 징조로 사용할 수 없어요

네번째 볼까요 마르코복음 1310절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주님은 마지막 심판이 오기전에 복음이 萬國에 전해져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리고 그 다음에 이걸 적어놨어요 우리가 해보겠다는 거죠 열심히 전해서, 정말 그럴까요 이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이 선교활동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이후에라야 주님이 오실수 있다는 그런 말이겠습니까? 도대체 모든 민족의 정의가 뭐에요 모든 민족의 구성원들이 전부다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믿고 안믿고는 차후 문제이고 모든 민족의 구성원들이 다 들어야 된다는 거에요 아니면 모든 민족 중에 한 사람만 들으면 그 민족이 들은걸로 해주겠다라는 거에요 어디를 지향하여 선교를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그것도 불분명하죠 그 이야기는 주님의 재림 전에 모든 민족에 편만하게 퍼져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돌아온 이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지 이세상에 있는 모든 부족들에게 단 한부족도 빼놓지 않고 모든 부족들에게 전부 복음이 전해져야 그때 예수님이 오실거니까 한사람에게라도 가서 다 전하자 이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도행전이 어떤 책이에요? 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성령과 함께 땅끝까지 이르러서 주님에 증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이에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땅 끝까지 가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 책이 사도행전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은 이미 사도시대에 이루어 진거에요 그게 지금까지 지속되어오는 거지, 사도행전 18절 보세요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일차적인 수신자 제자들 아닙니까? 너희가 땅끝까지 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땅끝까지 간사람이 사도시대에 있다 이 이야기를 쭉 풀어서 설명한게 사도행전이에요 자 보세요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예루살렘교회가 스테파노의 순교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되죠 예수님이 너희들은 분명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유대인들이 유대주의에 여전히 묶여서 유대인 이외의 다른 이들은 전부 개취급을 했어요 그러니까 전도할 생각을 안하는 거에요 하느님이 어떻게 해야돼요? 흩으셔야 되요.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들을 흩어버리세요 강제로. 그게 사도행전 81절입니다 볼까요 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유대로 흩어진다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흩어지는 과정에서 필립보가 땅끝에 사람인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오로는 당시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던 유럽에 까지 복음을 전하고 죽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도시대에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거에요 따라서 땅끝까지 모든 민족에 복음이 전해진 후에야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도 재림의 때 심판의 때를 추측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성경의 독자인 교회들에게 과거부터 늘 있어 왔던 그리고 그때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그런 흐리멍텅한 징조 징조로 쓰기에는 깔끔하지도 못하고 선명하지도 못한 그런 징조들을 주신 걸까요 그냥 주님이 야 어느때에 하늘이 5키로 간격으로 크게 갈라질꺼야 그때에 빨리가서 기도해 아니면 태평양을 20키로 간격으로 내가 확 갈라버릴테니까 그때 얼른가서 미사예배해 그때 성당가서 얼른 강론들어 그랬으면 깔끔하죠 근데 늘 있어 왔던 것을 징조로 주시면서 너희들 심판을 준비해 라고 이야기 한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일거 같으세요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당신이 승천하신 후부터 매일 매일을 심판의 날로 여기면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깨어서 살라는 의미에서 그런 징조들을 주신 거에요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징조로 주신 거에요 그런 일들이 일어날때 이게 죄의 증상들 죽음의 증상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빨리 거기서 벗어나는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거고 과거에도 일어났던 것을 징조로 주신 거에요

마치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고 무드셀라라는 이름의 뜻이 니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그러니까 에녹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느님이 무드셀라라고 지으라 그랬어요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할 거라는 거에요 실지로 무드셀라가 죽던날 홍수가 왔어요 그때 에녹이 그 무드셀라를 보면서 어떻게 살았겠어요 유아 사망율이 굉장히 높았던 그 시대에 이 아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하니까 이 사람은 매일 매일을 심판의 날로 생각하면서 산거에요 그걸 하느님과의 동행이라고 하는 거고 에녹이 하느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게 성도의 삶인 거에요 매일 매일을 심판의 날로 생각하며... 매일 매일을 준비하는 그 삶...이 성도의 삶이고 그들이 죽어도 죽지 않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사는 거라 말입니다 여러분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거라 말이에요 그거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니까 그 이야기를 모형으로 보여주는게 에녹의 삶이에요 바로 예수님은 그 삶을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 또한 바로 내일이라도 우리 주님께서 오실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이기며 인내하며 살아야 되는 거에요 지금 내 사정과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주님이 오시면 다 어떻게 되요 끝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가난해도 내일 주님오시면 그 가난 끝나요 아무리 아파도 내일 주님 오시면 여러분 그 아픔 끝납니다. 그러니까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 오늘이라도 심판이 임할 수 있다라고 심판을 준비하는 하느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오늘의 자기의 처지나 현실이나 소유에 일희일비 안할 수 있는 거에요 그까짓거 심판이 오면은 가진 거 다탈거고 없어도, 다 탈거에요 ....그렇게 사는 거에요 성도는 그러니까 누구앞에서도 주눅 안들어요 누구 앞에서도 내 처지가 부끄럽지 않아요 누가 부러우세요 절대 여러분에 현실을 바라보면서 주눅들지 마세요 절망하지 마세요

(마태복음 2436-44) 36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를 구하면서 그러한 징조가 보이면 그때부터 만사를 제처두고 기도에 힘쓰거나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거나 착한일을 하거나 봉사와 구제에 힘쓰며 살겠노라는 얄팍한 잔머리를 굴리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읽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시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성도들이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나와요 40절과 41절을 보면 한 사람은 휴거를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는데 둘다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둘다 밭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고 둘다 같이 맷돌을 잡고 돌리고 있었어요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는 거에요 종말에 심판에 모형으로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홍수때도 마찬가지에요 모두 다 일상을 살고 있었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식구들도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그게 나쁜게 아닙니다. 심판을 준비하래니까 뭐 가정도 내팽개치고 직장도 내팽개치고 그냥 교회에 와서 맨날 봉사하고 이런거만 하라는거 아니에요 무슨 산속에 수도원에 올라가서 수도사처럼 그렇게 살라는거 아니에요 일상을 사는 거에요 한사람은 밭에서 일하고 한사람은 예배하다가 하늘과 지옥으로 갈리지않았다니깐요 같은 일상을 살았어요 일상은 소중한 거에요 왜 우리가 그 일상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지어져가기 때문에 일상은 열심히 살아야 되는 거에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되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노아때에 노아와 그 가족들이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어요 다른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살았어요 그러나 노아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시키신 일을 하면서 자기가 생존해야 했기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거에요 그래서 며느리들까지 얻었단 말입니다 다 했어요 똑같이 했어요 하느님이 지으라고 하신 방주를 짓는데에 일손도 필요했고 먹어야 했어요 힘이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거에요 노아의 그 며느리들은 결혼을 하자마자 죽도록 배만 지었어 아이고 불쌍해 그게 목적이 아니였단 말입니다 성도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거 자체가 목적이에요 그것 자체가 그들의 생명인 거에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대해야 하는 일상이 있어요 우리도 날마다 일을 해야 하고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야 되요 그런데 그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 살던 사람들은 전부 홍수에 빠져 죽었어요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일상을 열심히 살던 이들은 방주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갔어요 그들이 세상사람들보다 고생을 덜했습니까? 굉장히 많이 고생을 했어요 산꼭데기에다 배 짓는거 죽도록 고생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만들어야 할 방주는 뭘까요 우리도 방주를 지어야 될 거 아니에요 방주를 짓기 위해 우리의 일상이 있는 건데 ~~ 방주는 사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배에요 방주에는 돋도 없고 닷도 없고 방향키도 없어요 테바라는 단어 그 방주라는 단어는 모세가 담겼던 갈대상자있죠 똑같은 단어에요 상자에요 상자 그거 물에다 둥둥 띄어 놓은 거에요 그 배를 어디다 써 먹어요. 세상사람들이 산꼭대기에다가 비도 한번 오지 않았던 그때에 산꼭데기에다가 그 배를 짓고 있는 방향키도 없고 돗도 없고 닷도 없는 배를 짓고 있는 그 노아와 그 식구들을 보면서 뭐라 그랬겠어요 저런 바보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내라고 이야기를 했을 거라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주신것중에 세상사람에게는 전혀 쓸모도 없고 활용가치도 없고 오히려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게 되는게 뭘까요 십자갑니다 그거 어따 써먹을 거에요 뒤집어서 누굴 때리는데 쓰나요 어따 써먹어요 그 십자가 십자가는 이세상사람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거에요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고 이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이들 나는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 아니면 나는 생존할 수 조차도 없습니다 라고 사는 그들, 그들은 세상사람들로 부터 바보 취급을 받아요 저런 자존감도 없는 인간들 그래 늘 당해주면서 한번 잘 살아봐라 이 험한 인생 그렇게 살수 있을것 같애 바보취급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자기 마음대로 개조를 해버려요 무력하고 힘없는 십자가가 아닌 기적과 능력에 십자가로 개조를 해서 그 십자가를 세상에 힘을 얻어내는 강력한 것으로 재탄생시켜요 로마를 두들겨 팬 십자가로 개조시켜 버려요 마징가 제트를 만들어 버린다니깐요 십자가는 세상에게 무력하게 맞아 죽은 거에요 그게 십자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그 십자가를 의지하여 세상사람들이 얻어내지 못하는걸 하느님의 도움으로 더 얻어낼 수 있대요 병도 막 고치고 기적처럼 사업도 다 일어나고 소원다 다이루어 진대 그런 십자가가 어디있습니까?

만일 노아가 하느님이 말씀하신데로 배를 짓다가 자기의 지혜를 보테서 여기서는 돋이 있어야지 닷도 있어야지 방향키도 있어야지 하고 그렇게 그 방주를 개조를 했다면 그 방주가 방주에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요 노아는 비바람이 치고 천둥이 칠때마다 자기의 생각데로 돋을 조정하고 방향키를 돌렸을 거에요 그렇게 되면 그 방주는 하느님에 목적지를 향해 갈수가 없어요 지 마음대로 자꾸 가려고 하면 하느님의 목적지로 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방향키 돗을 하느님께 맏겨 드리고 하느님 맘데로 하세요 그자리로 내려가는 거에요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자기부인의 삶을 산다라는건 나의 야망과 나의 소원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 지는걸 이야기 하는 거에요 내가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므로 난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바란다는 순종의 고백이 바로 십자가만 붙들고 있는 자기 부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건 세상에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볼때 바보같은 삶인 거에요 그러나 그들만이 심판을 면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바보같은 그 어디에다가도 쓸모 없는 그 방주만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인생을 걸었던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종말이 없다면 심판이 없다면 그렇게 힘든 십자가와 자기부인의 삶 안살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심판이 있어요 분명히 있다고 주님이 반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경이 반복하여 강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붙들고 자기부인의 삶을 살수 밖에 없어요 심판 때문에. 새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봤을때 그건 바보같은 거에요 분명히 바보같은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심판 때문에 반드시 그 삶을 살아야 되요 그 바보같은 쓸모없는 방주가 완성이 되자 심판이 임했어요 우리는 어떤 방주를 짓는거다...십자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 완전히 항복할께요 이게 방주가 완성되는 거에요 그때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행복과 우리의 만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가슴속에 명심을 하고 여러분 그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고 선포하며 살아야 되는 거에요 하느님의 심판은 도적처럼 임할 거니까 그 심판이 임할때 여러분이 추구했던 모든 것은 다 불타버릴거니까 그래서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사는 거에요 그들에게 주어진 가정과 직업과 이웃속에서 그들은 열심히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서 잔머리를 굴리면서 불성실하게 일을 한다거나 온갓 불법을 동원하여 일을 한다거나, 그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게 아니라 직장을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챙기는 거에요 그게 돗이 달린 방주처럼 개조된 십자가인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는 그 직장에서 최고로 성실하고 최고로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일하세요 그 댓가로 여러분 돈받는 거니까 일하세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는 가정에서도 자신의 유익을 챙기느라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아요 성도는 가정에서도 열심히 품어주며 사랑해주는 삶을 사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야 되기 때문에 실패하고 성공하는건 차후의 문제에요 그 삶을 통하여 나는 안되는구나만 배워도 괜찮아요 그래도 그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거기서 내가 십자가를 질 수 있다니깐요 거기서 내가 부인이 되요 나는 평생 내가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때까지 사랑하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맹세했던 이 사람조차도 사랑못하는구나를 배우세요 그러기 위해선 죽도록 사랑해 봐야 된다니깐요 안되도 괜찮다니깐요 거기서 내 부인이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일상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되요 성도는 대충 대충 살수 없어요 이 세상을 건성 건성 살수 없어요 그 십자가 자기 부인은 건성 건성 대충 대충 사는 삶에서 절대 주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러한 성도의 열심은 그 일상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에 일상은 심판 후에 삶을 준비하는 열심으로 채워져야 되는 거에요

새하늘과 새땅에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모은 재물이 쓸모가 없어요 여러분이 이땅에서 얻은 관직이나 명예가 심판때 통용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십자가만 온전히 붙들게 되는데에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소품들일 뿐이에요 그런데 누구에게는 그게 소품을 많이주고 누구에게는 그렇게 소품을 적게 주나 그 사람에게 딱 적당한 소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죠 그렇게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면... 완전히 소멸되서 멸망할 것들이 우상이 되어서 하느님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성경구절이 어디일까요

마태복음 2415절 보세요 15 “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16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달아나라 에 동그라미 치세요 여기서 멸망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에레모시스라는 헬라어에요 그 단어는 황패 멸망 소멸이란 완전히 멸망할거라는 거에요 그리고 가증한 것 이라고 번역이된 헬라어 브델리그마는 우상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멸망될 것이 우상이 되어서 그 우상이 거룩한 예수의 자리 그 십자가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을때 그때가 마지막 때라는 거죠 지금입니다 지금이에요 하느님이 지적하는 거에요 .~~ 니들은 금송아질 믿고 있는거지 내 이름을 부른다고 나 믿고 있는거 아니야 오늘날 교회가 믿고 있는게 금송아지지 무슨 하느님입니까 풍요와 다산의 신이지 무슨 하느님이에요 오늘날 교회들에게 그래 니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 한번 만들어봐 그러면 금송아지 만들어요 다 그게 번영의 신학이고 그게 성공주의 물질주의 아닙니까? 멸망할 것들이 멸망의 가증한 우상이 하느님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내가 하느님이야라고 하고 있는데 전부 그걸 쫓아가고 있는 시대 그게 오늘 아닙니까? 그말은 예수님은 이제 곧 오신다는 거에요 우리의 인생에도 그 심판이 곧 닥칠거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서 준비하라고 반복하여 강조하는 거에요 주님은 예고없이 도적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에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믿음으로 보이거든 산으로 도망가라 그러죠 믿음으로 너희들이 의지하고 있는게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 보이거든 거기서 마음을 띠라는 거에요 그게 도망가라는 뜻이에요 컴아웃 마이 피플 거기서 나와라 바벨론에서 나와라에요 거기서 니들이 잘먹고 잘살게 내가 도와줄께가 아니라니깐요 나와라에요 나와라 도망가라 ..돈 명예 자식 이런것들이 너희의 힘이되어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서... 그거 없으면 너희들이 지금 못살것 같이 살고 있잖아. 내가 하느님으로 착각하고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들거든 도망가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걸 얻어내기 위해 하느님께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공양했잖아요 도망가야 할 것들을 달라고 했으니 여태 뭣들 하신 거에요 중요한 애기에는 항상 배경음악이 깔리죠 도망가는 겁니다 여러분 나오는 거에요 거기서 뿌리박고 영원히 살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7-18)17 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 18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가려고 뒤로 돌아서지 마라. 이 세상에서 자기가 성취해 놓은 자기 물건 자기 소유, 자기 명성 그런 것에 미련을 두고 마치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돌아본 것처럼 마음을 거두지 못하면 심판으로 멸망당할 것이라는 이야기인 거에요 여러분 롯의 아내가 바라본 소돔과 고모라는 조금 있다가 불탔습니다 그런데 그거 한번본다고 뭐 나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거기에 집착한다니깐요 다 타버릴 거에요

가족관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이 새 몸으로 부활하면 신랑과 신부의 구별이 없어요 그말은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된다는 거에요 완전하게, 그래서 그 위에서는 여러분의 아들이나 부모가 지옥에 가 있어도 천국을 행복하게 살수 있는 거에요 그 관계가 지속되면 천국에서 내 아들이 지옥가 있는데 어떻게 살아요 못삽니다 나도 지옥갈래 그게 부모의 심정 아닙니까 그러나 거기서는 관계도 정리된다니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지옥에 가 있어도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거에요 그걸 우리가 자꾸 이세상에서 하나하나 끊어 내는 거에요 지금은 내 꺼라서 그게 나잖아요 내꺼라서 거기에 집착하고 있지만 아니라는 거에요 하느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이 되면 그런 것들은 내 안에서 하나 하나 끊어져 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겠죠 절대 놓을 수 없는 것들만 하느님이 다 놓으라고 하니까 그게 하느님이거든요 세상 것은 하느님이 심판이 이를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거룩을 위해 쓰이다가 새 하늘과 새땅에서는 전혀 필요가 없는 그런 것들인 거에요 그러니까 뒤돌아 보지 말라는 겁니다 가지고 가봐야 하나도 쓸모 없다라는 거에요 우리는 이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꼭 붙들고 있으면 되요 다른것은 전부 멸망의 가증한 것들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가 이땅에서 무언가 열심을 부리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못들어갈 것 같은 내용이 많이 나오죠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양과 염소의 심판이에요 한번 볼까요.

(마태복음 2531-40)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여기 보시면 예수님께서 오른편의 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굼주리고 병들었을때 양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비된 나라인 천국을 허락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이 말씀은 성도들의 구제나 선행을 독려하는 구절이 아니에요 만일 그러한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예수 안믿는 사람들 중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훨씬 많아요 교회다니는 사람들보다 안다니는 사람들 중에 착한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이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0절을 보시면 양들이 이 세상에서 잘 대접을 한 사람들이 누구에요 내 형제에요 예수님이 내 형제에게라고 이야기 하죠 너희들이 이러저러 저러한 일을 했는데 그들이 내 형제였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교회라는 거에요 불특정 다수가 아니에요 아무나 막 도와주고 아무나 막 사랑해주면 그걸 근거로 천국 보내주겠다는 말 아닙니다 마치 성도의 이웃사랑이 교회로 한정되는 것과 같은 그런 원리에요 니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거기에서 니 이웃이 누구였어요 하느님의 언약공동체였잖아요 그리고 그들의 별명은 지극히 작은 자에요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성도에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인 거에요 성도는 다른 성도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에 걸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야 저주받은 사람 저거 다른 사람들처럼 저 사람 뭔가 하느님께 잘못한게 있어서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내 천국 형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삶과 고난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내면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에 신앙을 견고히 다지고 있구나 라고 하며 그에 삶을 예수님에 삶으로 인정할때 그런 연약한 삶이 그리고 그런 약함이 예수님에 십자가를 이땅에서 경험하면서 자기 부인을 이루고 가고 있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저의 삶 속에서 예수의 삶이 나타나고 있구나가 바로 니가 내가 굶주리고 있을때 먹였고 내가 아플때 나를 돌봐줬고 내가 감옥에 있을때 나를 찾아왔다 라는 말인 거에요 이땅에 소유에 있음과 없음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소유가 없으면 전부 저주받은 거 병이 낫고 건강하고 돈이 많으면 전부 축복받은 거 이런걸로 그렇게 판단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에게서 예수를 찾아내고 십자가를 찾아내는 그들이 양이다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도에 세계관 전부 흥부 놀부 이솝이야기 처럼 성경을 읽으니까 그냥 거기서 착한일 하면 천국가는구나 이렇게만 보는 거에요 착한일 하면 다 천국갑니까 간디는 천국갔겠네요 그러면 슈바이쳐도 천국갔겠네요 그 사람은 신학자인데도 예수 안 믿었습니다 착한일은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이 도덕으로 윤리로 규정해 놓은 그런 것들을 잘 해내는걸 착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는 착한 삶은 그런 삶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 묵시록 20장에 흰 보좌 심판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는가 백보좌 심판 나오죠 심판대 앞에서 모든 인간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그들의 심판의 기준이 어떤 책에 기록된 이 땅에서의 그들에 행위에요 그 행위를 보고 심판이 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봐 착하게 살아야 되 그 책에 다 적혀 있어 이렇게들 이야기 한다니깐요 볼까요

(묵시록 2012-15) 12 그리고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4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15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여기보면 생명책과 행위들이 기록된 책이 나오는데 어떤 이들이 심판을 받는데 그 행위가 기록된 책에 기록대로 심판을 받아요 혹자들은 그러니까 착한일을 많이 해야 된다 나쁜일 많이 하면 안되라고 우기는데 15절을 보면 그 행위의 책과 상관없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심판에서 전부 제외가 되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행위들이 기록된 그 책에 의해 구원과 심판이 정해진다면 여러분들은 자신있으세요 그 책에 기록된 여러분의 행위대로 여러분의 심판과 구원을 받게 된다면 여러분 나는 자신있게 착한일 많이 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을 수 있어 그런사람 한분이라도 계시냐구요 여기서 없습니다 한번 보자구요 그 생명책은 언제 작성이 된 것이죠

(에페소서 14-5)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생명책은 이미 창조 이전에 작성이 된 거에요 여러분의 행위가 어떤 책에 기록되기 전에 이미 생명책이 먼저 있었다니깐요 그리고 구원은 그 책을 근거해서만 주어져요 그런데 심판은 사람들에 행위가 적혀 있는 책을 근거로 부어지죠 그렇다면 사람들의 행실이 적혀있는 그 책은 인간들의 구원에 근거로는 쓰일 수 없고... 왜 구원의 근거는 오직 생명책이니까 구원의 근거로는 쓰일 수 없고 단지 멸망의 근거로만 쓰이는 책이죠 그말은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에 행위는 심판에 근거로 밖에 쓰일 수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거에요 착한 일 많이 해서 내 행위가 기록된 책에다가 좋은 일들 많이 기록당하여 천국가자 이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

너희들의 행위는 하느님에 심판대 앞에서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의 너희들의 행위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의 근거로 쓰일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묵시록 20장에 백보좌 심판의 이야기는 착한 행실을 많이 해서 구원을 받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손톱만큼이라도 의지하는 이는 멸망에 심판으로 던져진다는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는 거에요

(요한복음 528-29)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아니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요? 선한일을 행한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여기서의 선한일을 도덕적 윤리적 선한일로 이해를 하시면 성경전체가 일관성이 없어지죠

예를 들어서 윗구절과 (로마서 910-13)은 완전히 모순처럼 보여요 볼까요

10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우리 조상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의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12 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어디서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한일을 하기도 전에 그 책에 이들에 행위가 적히기도 전에 이미 사랑한 자가 있고 미워한 자가 있다니깐요 이건 어떻게 화해시킬거냐 말이에요 하느님의 선택은 착한일을 한 결과로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누가 착한일을 하고 누가 악한일을 하기전에 이미 택한 백성을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세요 그럼 예수님의 말씀속에서의 선한 일은 어떤 일인가 사도행전으로 가면 진짜 착한일을 한 진짜 선한이가 나와요

사도행전 1038절 보세요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착한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좋은일(착한일)이 뭘까요 ? 예수님이 하신 좋은 일 ...예수님은 늘 착해요 그런데 무슨 좋은일을 하셨길래 착한일을 하시고 그래요 성령과 능력을 받아 ....하느님이 뜻하신 일에 자기를 완전히 드린걸 좋은일(착한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분명히 신성이 있음에도 능력이 있음에도 자기를 위해 전혀 쓰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십자가를 지는 데에 까지 자기를 완전히 내어 놓는 그 모든 일을 착한 일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 큰 오산이에요 그러니까 내 삶은 왜 이렇게 착한 삶이 안나오지 난 왜 여전이 이렇게 못됬지.어떤 면에 있어서 우리는 그 못됨속에서 착한일을 할 수가 있어요 착한 일은 성도가 성령을 받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여 하느님께 온전히 복속시키는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져 가는 길에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을 착한 일이라 그래요 성경으로 가볼까요

필리피서 16절 보세요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시작해요 하느님이 시작하시는 거에요 착한일을 시작한것도 하느님이고 그 일을 완성하는 것도 하느님이에요 우리는 그 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착한 일을 해가고 계실때에 거기에 그냥 끌려가면서 사는 거에요 자기를 부인당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에 그 삶을 쫓아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느님께 복종하신 예수님의 삶을 쫓아 순종하는 자로 그냥 납작 업드려서 죽지 않고 그냥 사는 거에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예수의 십자가 아니면 저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존재군요로 내려가는 그 과정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그게 착한 일인 것입니다 그대 그렇게 내가 부인이 되어지면 내 삶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경쟁자요 적으로 여기지 않고 또 얕보지 않는 그런 진짜 착한 일이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마지막 죽는 순간에나 그걸 깨달았다면 평생 착한일 한번도 안하고 살수도 있는 거에요 그래서 그러나 그에 삶은 착한 일로 점철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촛불들고 나와서 뭐 사회를 개혁하자 다른 이들을 뭐 변화시키자 이따위소리 하지 말고 먼저 자기부터 착한일 속에 하느님의 착한일 속에 들어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거에요 그건 복음의 은혜를 충분히 깨닫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사회를 개혁한다는 거에요 도대체 어떻게 정의를 구현해요 교회를 민주화하자 어떻게 그게 올바른 것입니까 누가 그게 올바르다 그래요 누가 그게 선한 것이라고 합니까 내 삶속에 착한일을 산건 예수거든요

(갈라디아서 219-20) 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는 하느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어요 하느님 저 놓지 마세요 이 절박함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거에요 그게 심판을 준비하는 거에요 내일 심판이 일어날텐데 오늘 내가 아직 이 모양이면 어떻게해요 이런 절박함, 내일 심판이 일어날때는 이게 다 필요없는 것일텐데 왜 나는 아직도 그것 때문에만 기도하고 있는가 라는 이런 안타까움 이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심판은 자기에게 절대 오지 않을것 같애요 그죠? 죽지 않을 것 같애요 인제 명이 길어져 갔고 노인네들도 너무 담대해 졌어요 70 80된 분들도 이제는 수명이 길어져서 난 아직도 괜찮아 이러고 있으니까 심판이 이게 무색해 진거에요 아닙니다. 여러분 심판은 곧 와요 개인적 심판과 일반적 심판 이 두가지 개인적 심판은 죽음입니다. 일반적 심판은 예수의 재림이에요 이 두가지는 언제 우리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거에요 그래 준비하세요 에녹처럼 무드셀라를 내가 붙들고 있는 거에요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 십자가 꼭 붙들고 하루하루 사는 거에요 그리고 내일 심판이 임하면 나의 오늘 이 지저분하고 이 더럽고 이 불만족스러운 이 고통스러운 삶 당장 끝날거야 그런데 조금 유예하신 것뿐이지 내일 안와도 괜찮아 그러나 언젠가는 그 심판이 와서 나의 이 지긋지긋한 삶 다 끝날거니까. 나는 오늘도 괜찮아 이렇게 일어나는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심판을 준비하는 거에요 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도적처럼 못와요 왜 매일 매일을 심판을 준비하면서 살았거든요 여러분의 일상을 성실하게 사세요 최선을 다해서 사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