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22 조회수1,805 추천수13 반대(0)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어진 일이 있으면 미리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운 시절, 형제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중학교엘 다녔습니다. 당시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는 정류장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정차하기도 했습니다. 달리고 달려서 버스에 타지만 내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체격도 적었고, 키도 작았습니다. 학교 앞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간적도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1시간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 가방이 조금 무거웠지만 교통비도 절약되었고, 걸으니 마음도 편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니 과제물이 많았습니다. 신학, 철학, 라틴어, 성서신학의 과제물이 있었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모두 자신의 과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과제물은 미루면 쌓이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외출 시간에 나가지도 못하고, 운동 시간에 놀지도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과제물은 내 주는 날 바로 작성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습관이 되니 요령도 생기고,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유능하지 못했던 제가 신학교의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건 미리 하는 습관의 도움이 컸습니다.

 

교구 성소국에 있을 때입니다. 교황님께서 한국 방문을 결정하셨고, 주교회의 차원에서 교황방한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영성, 신심 분과를 맡겨 주셨습니다. 기획, 재정, 행사, 전례, 의전, 대외 협력, 자원봉사를 담당하는 분과가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업무를 맡겨 주신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제가 맡겨진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한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문 작성, 자료집 제작과 번역의 일을 가장 먼저 마쳤습니다. 교황청 정의 평화 위원회 주교님을 모시고 강연을 다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능력보다는 저의 성격을 보시고 일을 맡겨 주셨고, 저는 큰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었습니다.

 

미리 하는 습관은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미리 하기는 하지만 깊이가 적었습니다. 일에 매몰되면서 중요한 건 하지만, 소중한 걸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성격이 다른 주변의 사람을 힘들게 한 적도 있습니다. 회식이나 모임의 자리에서 즐기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급한 성격에 먼저 나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자리는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긴장의 끈도 풀러놓고, 허심탄회하게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준비하고 있는 종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어진 일을 미리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준비하는 종이 아닙니다. 만원 버스를 타기 싫어서 걸어 다니는 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준비하는 종이 아닙니다. 맡겨진 과제물을 미리 하고, 맡겨진 일을 가장 먼저 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준비하는 종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도시 빈민 사목을 10년 이상 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작은 집을 얻어 밥을 해 먹으면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사는 친구입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과는 밤을 새워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입니다. 추운 겨울 광장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친구입니다. 뜨거운 여름 복직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친구입니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건, 사랑은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시인의 말처럼 언제나 공존의 그늘을 찾아가는 친구입니다. 시간이 흘러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은 친구입니다. 가슴은 아직도 뜨거운 친구입니다. 저처럼 미리 준비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여유가 있는 친구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는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올 때가지 깨어 기다리는 종은 따로 있었습니다.

 

일의 성과와 능률을 보는 게 아닙니다. 일의 가치와 의미를 보는 겁니다.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멈추고 기다릴 줄 아는 겁니다.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늦더라도 함께 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종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으십시오. 생각하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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