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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9주간 목요일]성령의불 (루카12,49-5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24 조회수966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29주간 목요일]성령의 (루카12,49-53)


바오로 사도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로마  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하시며, 한 집안의 식구들이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 (루카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로마6,19~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23)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품삯은 죽음이요, 하느님의 은총의 본질과 최종 결과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임을 밝히는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구절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6장 12절부터 계속되는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성화(聖化)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하면서 결론적으로 죄와 은총의 최종적 결과를 비교하며 선언한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은 상반절과 후반절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첫째 '죄의 품삯' '하느님의 은사'의 대조이며, 둘째 '죽음''영원한 생명'의 대조인데, 사도 바오로는 '품삯' '은사' 간의 대조를 강조하고 있다.

죽음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필연적이며 정당한 대가요 보수로 얻어지는 것인 반면에, 영원한 생명 무상으로 얻어지는 선물임을 비교를 통해 부각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품삯'으로 번역된 '타~옵소니아'(ta~opsonia; the wages)는  복수형으로 '보수들', '봉급들'이란 뜻이다.

매일 혹은 매월 받을 권리가 있는 보수, 그래서 그 권리가 침해당한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는 급료를 언급할 때 사용되던 용어이다.

 

70 인역(LXX) 등의 후기 그리스 문헌들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여 군인들이 받던 곡식이나 기름과 같이 마땅히 대가로 지급되는 식량과 더불어 군인의 생계 수당이나 일반적인 급료 혹은 관료의 봉급을 의미했다.

이것은 자기 몸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번 것인데, 이처럼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감정으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수(pay; wage)이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의 본질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지불하는 품삯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죄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한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은 죽음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은사'로 번역된 '토~카리스마'(to~charisma; the gift)'선물','부여된 은총', '특은'이라는 뜻이며, '품삯'이라는 말과 대조적으로 단수로 쓰였다.

라틴어 'donatium'(도나씨움)과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이 단어는  수고하지 않고 받은 선물이며, 황제의 생일이나 등극일 혹은 어떤 특별한 기념일에 가끔 군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거저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은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 일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주시는 아주 특별한 은총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노력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에페2,8.9).

 

따라서 아무도 자만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자력 구원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로마 3,20).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님 우리 주님 안에서만 있는 것이어서 그분 밖에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이것을 얻지 못한다.

 

예수님 없이도 얼마든지 착하고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인간이 본래 죄에 예속된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 없이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죄를 위한 것이고 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수는 바로 죽음이 전부인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49~50)

 

루카 복음 12장 49~53절은 복음이 확산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진리와 비진리의 처절한 투쟁과 충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루카 복음 12장 49절과 5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전파에 수반되는 현상을 '불'과 '세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타올랐으면'으로 번역된 '에이 에데 아넵테'(ei ede anepthe; (if) it were already blazing)에서 '아넵테'(anepthe)동사가 '불이 붙었다'는 의미를 지닌 부정(不定)과거형으로 완전히 불붙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성서학계에서는 이미 불이 붙었으나 완전하게 붙어 더 잘 타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본다.

 

여기서 '불'로 번역된 '퓌르'(pyr; fire)는 신앙인과 불신앙인간에 조성되는 적대감이나 박해로 인해 믿음의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불'과 같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과 미움, 죄악과 불의 그리고 박해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만, 바로 그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복락과 축복이 되고, 고난과 박해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됨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천상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 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요,'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기쁘게 고난을 감수할 의지와 신앙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장에는 그 진리 때문에 세속화(世俗化)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흐르는 교회 안에서조차 따돌림당하고 배척 받는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스테파노의 순교 형장을 천상에서 서서 바라보시고 동참하시는 것 (사도7,55~56)으로 위로를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인정받는 자세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면,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이 없다.


당신의 천주성(神性)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이 당신의 전지(全知)하심으로 다 들어오며 다 보고계신다. 그 안에는 나의 죄도, 너의 죄도, 우리 모두의 죄도 다 들어있다.

그러기에 이 겟세마니의 밤은 참으로 괴롭고 가슴아픈 밤이다.


이제 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무죄(無罪)하신 당신의 인성(人性)으로 자발적으로 대속(代贖)해야만 아버지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채워지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독당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선성(善性)과 성성(聖性)이 회복되신다.


죄(罪)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하시는 밤이다.

겟세마니의 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나약한 인성(人性) 사이의 전쟁터이다. 이 겟세마니의 밤은 예수님 당신의 천주성(天主性)과 인성(人性) 사이의 갈등과 충돌의 시간이다.


그러나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이 대속의 십자가의 길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요, 예수님 당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당신 사명인 인류구속사업을 이루실 날을 답답한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바로 그 말씀이 루카 복음 12장 49절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how I wish it were already blazing!)  그리고 50절의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how great is my anguish until it is accomplished!)로 표현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인류의 죄로 인해 당해야 하시는 고난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이룰 날이 속히 오기를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적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례(洗禮)란 용어로 표현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세례가 갖는 씻음(정화)과 정화의 의미 가운데서 일치(一致)의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지체)이 되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2장 49~53절에서 당신이 감당하실 고난을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날까지 믿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나을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걸어가야만 한다.


이 땅에서 고난, 고난, 고난 또 고난은 없다. 또한 이 땅에서 영광, 영광, 영광 또 영광도 없다. 고난 한번, 영광 한번, 영광 한번, 고난 한번이다. 그래야만 절망하지 않고, 그래야만 겸손하게  성소(聖召)와 소명(召命)의 삶을 잘 마칠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억울한 고통, 터무니 없는 사악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믿음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간택하신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요, 특별 관리 대상자들이며, 성령과 말씀과 희생 제사의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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