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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은 누구에게서 위로를 받을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24 조회수846 추천수0 반대(0) 신고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속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바로 어제 묵상 글입니다. 인도의 수도사제이신 안토니오 신부님의 사연입니다. 신부님이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를 당해 의사들이 태아에게 문제가 발생할 것 같아 낙태를 권했지만 어머니께서는 태아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태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한 후에 우여곡절 끝에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서 사제가 되었고 이제는 그런 어머니께서 위암에 걸려 위의 90%를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되는 상황에서 의사들은 어머니의 생존기간이 3개월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아들인 신부님은 미사 때 하느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모든 걸 당신의 뜻에 맡기겠다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어머니는 수술 후 완치되셨고 건강하게 생활하시고 계신다는 내용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들 신부에게 이런 말씀을 남깁니다. “아들아,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나는 너를 보호했었다. 이제는 네가 나의 치유자가 되었구나.”

저는 이 묵상글을 읽고 나서 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감동의 여운이 전해옵니다. 모자간의 사랑이라 저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다가옵니다. 저는 아직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하느님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은 만약 어려움이 있다면 누가 위로를 해 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나서 조금 묵상을 해봤습니다. 하느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을 초월하신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인간이야 인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 위로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근데 하느님은 오로지 하느님과 같은 존재는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하느님과 같은 분이 또 한 분 계신다면 당연히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 사람이야 힘든 일이 있으면 그래도 누구한테라도 하소연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그럴 상대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럼 혹자는 이렇게도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도 초월하니 하느님이시지 그런 것에 매인다면 어찌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을 한번 해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은 가질 수 있고 단지 이런 인간의 감정도 가지시면서 이런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또다른 절대적인 속성도 가지고 계신다고 봐야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보면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인간들을 봤을 때 측은한 마음이 드신다고 표현하시는 것만 봐도 예수님과 하느님의 근본 본성은 같으시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하느님께서도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다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뚱딴지 같은 생각이 났던 겁니다.

 

좀 우낀 이야기이지만 저는 하느님이 왠지 남자 같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냥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도 이럴 때는 짝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느님께서도 참 불쌍하십니다. 우리 사람 같으면 부인에게라도 말이라도 하소연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를 못하니 말입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안토니오 신부님의 일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하느님은 여우 같은 마누라가 필요없고 토끼 같은 새끼한테서 위로를 받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마누라 이런 단어를 쓰는 걸 아주 안 좋아하는데 세상말을 인용하려다 보니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나름 뜻이 있는데 그건 나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님의 일화는 우리에게 어떤 걸 교훈으로 주는 것일까요? 저는 우선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먼저 생명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배속에 있는 생명은 자기가 만든 생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보통 사람이라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다면 두려움이 많이 클 수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라는 생각보다는 그 생명도 하느님께서 주신 귀중한 생명이라는 데 더 초점을 맞추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이쁘고 아름답고 향기나는 마음이라 하느님께서 아이를 축복하셔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축복을 가지고 태어나 사제가 된 아들은 또 한 번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그냥 어머니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는 그런 기도를 드린 게 아니고 어머니께서 사시든 돌아가시든 오직 당신 뜻대로 해주소서 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제가 만약 하느님이라면 정말 이 아들의 기도는 갸륵하고 하느님을 울리는 기도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기에 그래도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살려주십사 하고 하는 기도를 드리는 게 인간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신부님은 달랐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면을 초월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든 걸 하느님 뜻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에 감동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라야 정말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 딸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긴다면 설령 하느님께서 가슴 아픈 일이 있어 마음이 아파도 그 아픈 마음을 감히 우리가 어루만져드린다고 하면 황송한 표현이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드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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