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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 나라 비유 (루카 13,18-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29 조회수1,094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 나라 비유 (루카 13,18-21)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한다. (로마 8,18-25)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화답송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3ㄱ)
◎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비유하신다. (루카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8,18-25)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8,18.22-25참조)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 1~17절에서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 하느님의 자녀는 천당 영복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된다는 사실과 더불어 로마서 8장 17절 말미에서 이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로마서 8장 18~2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종말론적 영광에 대한 희망을 가질 것과 희망 중에 인내해야 할 것에 대해 권고를 주고 있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현재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로마서 8장 17절에 이어 다시 한번 언급하며 그와 대조적으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사람에게 예비된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영광에 대한 강조는 로마 교인들에게 어떠한 핍박과 환난과 박해가 닥치더라도 그 고통을 넉넉히 인내하여 극복하게 하는 힘을 줄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8장 18절에서 '생각합니다'라는 '로기조마이'(logizomai; I concider)라는 동사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간주하다','신중히 생각하다','논리적인 결론을 가지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오로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고난을 어떤 시각으로 보며,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그것을 다만 유익 없는 고난으로만 보게 되면,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불평이나 원망만 생기며, 낙심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신중한 생각을 따라 일체의 고난이나 시련을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서 볼 수 있다면, 그럴 때에 고난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로마서 8장 18절에서 말하는 영광은 장차 '나타날' 영광이다.

여기서 '나타날'로 번역된 단어 '아포칼륍테나이'(apokallypthenai)의 원형 '아포칼륍토'(apokallypto)'~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덮다'(루카8,16),'가리다'(2코린4,3)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칼륍토'(kallypto)의 합성어로서 '가려진 것을 제거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본래 베일에 가려져 있거나 덮혀 있는 것을 열어 젖히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로서  성경에서 '계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계시하는데(마태11,27; 갈라3,23; 1베드1,12),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영광도 바로 이런 차원과 성격의 것이다.

 

이 영광은 현재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으나 때가 되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할 때 이루어질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때 변화된 위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영원히 복된 상태의 삶으로 들어갈 것이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19)

 

로마서 8장 19절부터 22절까지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 세계도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영광 및 피조물 자신의 영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의인법을 사용하여 아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을 제외한 만물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자기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가운데 하루 속히 그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인간 이외의 피조물이 이러할진대 하느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아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절히'로 번역된 '아포카라도키아'(apokaradokia; earnest expectation)'~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 '머리'라는 뜻을 가진 명사 '카라'(kara)'생각하다'라는 뜻과 더불어 '보다'라는 의미도 갖는 동사 '도케오'(dokeo)의 합성어로서 '머리를 길게 빼고 지켜보다'라는 뜻을 가진 '아포카라도케오'(apokaradokeo)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절한 기대''큰 희망'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사도 바오로는 '기다리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아펙데케타이'(apekdechetai)라는 단어까지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바라다'(히브11,10)라는 뜻을 가진 '엑데코마이'(ekdechomai)의 합성어로서 '열심히 기다리다'라는 뜻이 있는 '아펙데코마이'(apekdechomai)현재형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명사 '아포카라도키아'와 함께 그 기다림의 강도가 얼마나 큰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강조적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을 제외한 다른 피조물 역시 타락과 구원의 결과들에 있어서 인간과 똑같이 참여하므로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되며,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에 동참할 것을 지향한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은 바로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영광에의 입성을 의미한다.

여기 '나타나기를'로 번역된 단어 '아포칼륍신'(apokallypsin)'감추어져 있던 것의 나타남'이란 뜻으로서 로마서 8장 18절의 동사 '아포칼륍테나이'와 어근이 같으며 그 의미도 같다.

 

모든 피조물들이 새롭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재림때에 변화된 위상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며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피조 세계가 그들 자신과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인간의 종말론적 영광을 그토록 바라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로마서 8장 20절과 21절에 나타나 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20)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21)

 

여기서 '허무의'로 번역된 '마타이오테티'(mataioteti)'마타이오테스'(mataiotes)의 여격 단수이며 '무익함','쓸데없음','목적없음' 등을 나타낸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헤벨'(hebel)의 역어로서 허무하고 의미없는 인생사를  묘사하는 용례로 쓰였다(욥기14,1; 시편103,14; 코헬렛1,2).

대체로 학자들은 이것을 자연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제지하고 있는 생명력의 결핍과 자연의 세력이 목적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당면하고 있는 좌절이라고 보며, 이것은 죄로 인한 하느님의 저주의 결과로 된 것이다(창세3,17.18).

 

그런데 피조물이 이와 같은 것의 '지배 아래 든 것은'으로 번역된 '휘페타게'(hypetage)는 명사가 아닌 동사이며 '휘포탓소'(hypotasso)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예속되었다','복종당했다','굴복당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부정 과거 시제는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의 죄로 인한 창세기 3장 17절과 18절의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피조물들은 창세기 3장 17절과 18절에 묘사된 땅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자연 만물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과거에 그렇게 된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만물을 회복시키는 종말의 날까지 속 된다. 자연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허무의 지배 아래 들게 되었는데, 태풍, 지진, 기근,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들 및 동식물의 죽음, 부패 등 모두가 그런 현상이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로마서 8장 20절에 나오는 데로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다.  

 

여기서 어떤 미래적 희망을 바탕으로 해서 허무의 지배 아래 들게 하는 존재를 나타내는 '톤 휘포탁산타'(ton hypotaksanta; the will of the one who subjected it)는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복종하게 하시는 분(시편8,7.8; 1코린15,27.28)으로서 비록 한시적 기간 동안 피조물을 허무의 지배 아래 들게 하시지만, 회복의 희망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이 회복의 희망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토대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좁쌀보다 작은 겨자씨가 1.5-3미터 크기의 큰 나무로 자라나 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듯 미소한 것이라 해도 하느님을 품고 있습니다. 또 백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빵을 구울 수 있는 밀가루를 부풀리게 하는 누룩처럼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극히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하느님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가 썩어 없어지고,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리고 흔적 없이 사라짐으로써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봅니다. 스마트폰에 눈과 손을 고정하며 살아가는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사람들의 뇌도 깊은 성찰과 분별없이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이 되어간다고 하지요. 내 이익과 관련되거나 자극적인 것들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입니다. 

이런 피상적 관심 속에 평범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가시적인 능력이나 성과를 내지 못하면 불만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무것도 없지요. 

우리 삶에서 겨자씨와 누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작은 배려, 보이지 않는 선행, 부드러운 말씨, 고통 받는 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의 절규에 함께하는 행동 그런 것들이겠지요. 그런 마음과 손길이 모아질 때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가치 없어 보이고 사소한 것을 이용해서도 엄청난 선과 사랑을 이루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 나의 작은 생각, 하찮아 보이는 사람, 평범한 말과 행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겨자씨가 자라나 하늘의 새가 깃들일 정도의 큰 나무가 되려면 씨는 땅에 묻혀 썩어 없어져야 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변화와 성장은 희생과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내가 죽어 모두를 살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오늘도 사소한 일상사와 하찮아 보이는 이들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소중히 여기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하고, 자신이 변화되고 희생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누룩이 되도록 힘쓰는 창조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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