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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좁은 문 (루카13,22-3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30 조회수1,189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좁은 문 (루카13,22-30)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고 한다. (로마 8,26-30)
형제 여러분, 26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27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화답송 시편 13(12),4-5.6(◎ 6ㄱ 참조)
◎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리이다.
○ 주 하느님, 살펴보소서, 저에게 대답하소서.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 하지 못하게, 제가 흔들려 적들이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
○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8,26-30)

 

"형제 여러분,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26)

 

로마서 8장 26절부터 30절까지는 성도들에 대한 중재(중보) 활동 하느님의 완벽한 구원 섭리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확신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서 '나약한'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astheneia)의 원형 '아스테네이아'(astheneia)부정 불변사 '아'(a)'굳세다', '강하다'(1베드5,10)라는 뜻의 동사 '스테노오'(stheno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질병이나 육체적인 약함(마태8,17; 루카5,15)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연약함더 나아가 비유적으로 '비겁' 혹은 '나약'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간들에서 이 명사를 비유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이나 또한 사태를 분석하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지혜롭게 간구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함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바로 성도들의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와주십니다'로 번역된 '쉬난틸람바네타이'(synantillambanetai)그리고 '~와 함께'라는 의미의 전치사 '쉰'(syn)과 그 자체로서 이미 '돕다', '헌신하다', '참가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안틸람바노마이'(antillambanomai)의 합성어로서 '함께 가담하여 열심으로 돕다'라는 의미를 지닌 '쉬난탈람바노마이' (synamtillambanomai)의 현재형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두 번 발견되는데, 루카복음 10장 40절에서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반면에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령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적인 기도를 하도록 중재하여 우리와 일치하신다는 의미가 있고, 이 동사가 단순히 옆에서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어 함께 짐을 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 단어는 '떠맡는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사도 바오로가 전달하려는 성령의 도우심우리의 나약함을 그분께서 대신 떠맡으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 주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나 환난, 실패와 좌절 등을 만나더라도, 성령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두려워 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본문은 성령께서 우리 나약함을 도와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할 줄 '로 번역된 '토 ~ 티 프로슉소메타'(to ~ ti proseuksometha)에서 의문사 '티'(ti)'무엇'(what) 혹은 '어떻게'(how)라는 뜻이므로,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여기서 '프로슉소메타'(proseusometha)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의 미래 시제이며, '기도하다', '간청하다'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가 기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무지한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없기에 옳게 기도할 수가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어떤 주어진 상황 아래서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의 최종 목표와 전반적인 계획을 알면서도 올바르게  기도할 만한 지혜가 부족하여 당혹스러우며, 영적 승리를 거두는 데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가 있으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구절은 영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우리 인간의 한계성을  가장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가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조차도 할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일 누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만한다면, 그는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며, 여기에는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고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를 잘 아신다(1코린2,10).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간구해 주십니다'로 번역된 '휘페렌튕카네이'(hyperentyngchanei)의 원형 '휘페렌튕카노'(hyperentyngchano)는 '~을 위하여'을 뜻하는 전치사 '휘페르'(hyper)'탄원하다', '간구하다'를 뜻하는 동사 '엔튕카노'(entyngchano)의 합성어로서 '아무개를 위하여 중재하여 탄원해 주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동사 뒤에 '우리를 대신하여' 혹은 '우리를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구 '휘페르 헤몬'(hyper hemon)성령께서 '누구를 위해' 간구하시는지 보다 명확히 명시해 주지만, 본절의 문맥과 동사에 이미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 전치사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간구해 주십니다'라는 단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직설법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그 어느 때까지 항상 변함없이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중재 간구하는 방식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는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이'로 번역된 '알랄레토이스'(allaletois)의 원형 '알랄레토스'(allaletos)부정 불변사 '아'(a)'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랄레오'(lalleo)의 파생어가 합해진 단어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언어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정도로 애통해 한다는 의미이며, 의미나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마음을 통해 하느님께 탄식의 형식으로 간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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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복음(루카13,22~30)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4)

 

본절에서 '힘써라'에 해당하는 '아고니제스테'(agonizesthe; strive; make effort to)의 기본형 '아고니조마이'(agonizomai)는 원래 경기에서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다', '싸우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최선을 다하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루카 복음 13장 25절문이 열려 있을 때와 닫혀버린 이후를 대비한다는 점에서, 이 동사의 의미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어떻게든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구원의 문을 들어가도록 애쓰라는 것이다.

 

또한 본절에서 '문''집의 문'을 가리키는 '튀라'(thyra; gate; door)로 표현된 반면에, 마태오 복음 7장 13절에서는 '성문' 또는 '성전의 문'을 가리키는 '퓔레'(pyle)로 표현되었다.

 

이런 차이13장 25절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집주인'의 역할에 따라 이 구절의 배경을 어떤 성이나 성전이 아닌 '어떤 집'으로 맞추기 위한 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문을 특별히 '좁은 문'('테스 스테네스 튀라스'; tes stenes thyras; the strait gate; the narrow door) 으로 묘사한 것은, 앞의 '힘써라'는 표현과 함께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안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진정으로 구원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하겠지만'에 해당하는 '제테수신'(zetesusin; will seek; will try)의 기본형 '제테오'(zeteo)'추구하다'는 뜻으로서 개인적인 추구와 노력을 가리킨다.

결국 이 동사는 구원에 있어 아무런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헛된 노력과 시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3장 25절과 관련지어 볼 때, 문이 닫혀진 후에 계속해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당신께 구원을 겸손히 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자신의 노력과 인생의 헛된 수고만으로 구원을 얻기를 추구한다면,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 없음을 본절에서 사용된 '제테오'(zeteo) 동사의 뜻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유대인들에게 적용할 때에는, 그들의 인본주의적인 전통이나 율법에 대한 추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원은 인위적인 노력으로만 얻어질 수 없다는 방법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못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우크 이스퀴수신'(uk ischysusin;  will not be able to)'그들이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뜻으로 불가능의 의미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할 수 있다'는 뜻의 기본형 '이스퀴오'(ischyo)미래 직설법 능동태로 사용된 '이스퀴수신'(ischysusin)부정어 '우크'(uk)와 더불어 그들의 구원에 대한 노력은 마지막 때에 무익한 것으로 드러날 것임을 표현해 주고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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