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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11.3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30 조회수1,957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9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로마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마태 4,8-1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7~80년대의 대학가를

이야기하는 소설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대

(저는 8~90년대입니다)보다

 훨씬 더 옛날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읽으면서 제가 다닐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문득 요즘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과

저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매우 다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먹어대고,

똑같이 놀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최첨단 IT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뿐,

근본적인 것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한

고등학교 동창 딸이 제게 묻습니다.
“삼촌, 아빠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어요?”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서 “네 생각은

어떠했을 것 같아?”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빠 머리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나 공부는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고지식한 것을 보면…….”
제가 알고 있는 이 친구는 공부를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대신 노는 것을 좋아했고

 우정과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부하지 않는 딸이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녀들이 늘 걱정되는 것도 변함없이

이어져 왔고, 자신은 그러지 못하면서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시대와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똑같이 울려 퍼지는 힘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은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에서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던 배와 가족을

뒤로하고 주님을 곧바로 따르지요.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을

염려하면서 꽉 움켜잡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지금을 사는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그대가 내일 죽는 것처럼 살아라.

그대가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마하트마 간디)

만족한다는 것.

오랜만에 만난 어떤 자매님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 다 좋아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삶,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으로 ‘행복하다’는 또 다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최고의 삶,

완벽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그런 삶 자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만족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여기에 무엇인가 더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을 어떻게 만족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를 충족시키면 그만입니다. 남과의 비교?

이것은 남의 삶을 따라서 사는 것이고,

그래서 나의 만족을

충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멈추는 것

등이 소소한 것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발견하게 해 줄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오.

(성 안드레아 사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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