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을 생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30 조회수1,464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에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은 자신을 기다렸던 신부가 애처로운 마음에 어깨를 어루만져 주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신랑의 손길이 닿을 때 그제야 신부는 재가 되어 내려앉는다고 시는 표현합니다. 이 시에 나오는 신랑은 소피가 마려워 잠시 볼일을 보려고 문을 나서다가 옷이 그만 문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신랑은 신부가 잡은 것으로 오해를 한 나머지 그냥 요망한 부인이라 생각해 그만 신부한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수십 년이 지나 신방이 있었던 집 주위를 가게 되어 옛날 생각이 나서 한번 들러봅니다.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신부가 옛날에 자신이 풀어준 귀밑머리를 한 채 그대로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신랑은 그만 그런 신부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서 어깨를 어루만져 줍니다. 그때 신부는 자신이 혼례를 치른 그 신랑의 손길이 닿을 때 신부는 재가 되어 내려앉는다고 시인은 표현을 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고 신랑이 올 때까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가슴 저미며 애태우는 마음이 너무나도 지극하여 그 그리움이 신부의 애간장을 태웠기에 재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봅니다. “저는 당신이 올 때까지 정절을 지키며 일편단심으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고 시인은 표현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시는 시로서만 감상했을 때 제가 이 시에 나오는 신랑의 입장이라면 정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습니다. 수십 년을 자기만을 기다리고 정절을 지켰는데 자신의 오해로 빚어진 생각이 그만 한 여인에게 설움과 그리움이 첩첩이 쌓여 가슴에 한이 맺힌 한평생을 보내게 만들었으니까요. 이 시에 나오는 여인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변함없이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다시 오신다는 님을 기다리고는 있지만 오실 날짜는 기약이 없으니 암담할 수 있겠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항상 깨어 있어 언제 당신이 오신다 해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기다리는, 애타는 그리움이 설령 재가 된다 할지라도 당신의 지고지순한 신부가 되어 영원히 당신 품안에서 당신의 아내로 살기를 희망하며 언제나 당신을 향한 그리움으로 당신을 만나는 그날까지 이 맘 변치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올 뿐입니다.

 

신부는 반 평생을 무슨 연유로 신랑을 기다렸을까요? 여자에게 정절을 강요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떠나서 이 시를 우리의 신앙과 결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귀밑머리는 이마를 중심으로 해서 좌우로 머리를 갈라 뒤로 넘기는 우리의 옛날 아녀자들이 전통적으로 땋아 넘긴 머리를 말합니다. 귀밑머리를 풀어주는 것은 정상적인 혼례를 치른 남편만이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이미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백합처럼 지고지순한 여인이었습니다. 저 같았으면 홧병이 나서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지고지순한 여인일까요? 일단 왜 신랑이 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것입니다. 신랑이 무엇 때문에 오지 않은지 알았더라면 그토록 재가 될 때까지 기다렸을까요? 기다리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혼례는 치렀고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초야도 치르지 않아서 혼자가 된다는 건 어쩌면 신부 입장에서는 시댁에서 소박맞은 여인의 신분이 되니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딱할 노릇입니다.

 

초야는 우리에게 무엇을 상징할까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라고 한다고 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실 겁니다. 왜 오시겠습니까? 신랑이 혼인을 하려면 신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신부가 결혼을 앞두고 일명 신부수업이라는 걸 합니다. 요즘은 구닥다리 이야기이지만 아주 예전에는 그랬나 봅니다. 결혼해서 살아가려면 최소한 신부로서 알아야 할 게 있을 겁니다. 그래야 시댁에서 훌륭한 며느리를 들였다고 집안에서 칭찬이 자자할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만약 비유를 한다면 딱 지금 우리 입장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신랑은 열처녀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슬기로운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할 겁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자기를 데리러 올 거라는 믿음의 기름을 잘 준비해서 결국엔 신랑과 혼인잔치를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초야는 혼인잔치가 끝나고 치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 시에 나오는 신랑이 신부의 귀밑머리를 풀어준 게 마치 초야를 치른거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비유하면 정말 비슷하리라 봅니다. 이 시에 나오는 신랑은 야속한 사람입니다. 신부를 오해했으니 말입니다. 근데 우리가 기다리는 신랑은 어떤가요?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안 오시는 겁니다.

 

우린 잘 모르지만 하느님의 뜻이 있으니깐요. 근데 분명 약속은 하셨습니다. 분명히 저희를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신부는 언제 올지도 모르고 또 온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도 반평생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아마 어쩌면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근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오신다는 약속만은 하셨습니다. 시에 나오는 신랑은 호기심에 들렀지만 말입니다. 이틀 전 복음에도 나옵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고 말입니다. 결국 슬기로운 처녀처럼 되어야 될 겁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먼저 신랑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냥 단순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기름을 잘 준비했습니다.

 

기름은 한 번만 채우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다리다보면 기름이 다 닳아서 떨어지면 또 채워넣어야 됩니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늘 변함없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신랑이 하라고 하는 말을 잘 이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신랑은 자기를 믿고 끝까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며 성실하게 신부수업을 잘 하고 있는 신부를 보게 되면 그 신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건 당연할 겁니다. 저라도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신랑을 만날 수 있는 건 누구에게도 기회가 열려 있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하늘나라 왕의 아들인 신랑을 만나 즐겁고 행복한 혼인생활을 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세상에서 온갖 힘든 신부수업을 하면서 일어나는 눈물과 고통을 맞바꾼 사람들만이 예수님이신 신랑을 만날 수 있는 특혜와 행운이 주어지리라고 저는 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