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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1주일] 늘 깨어 준비하라 (마태 24,37-4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01 조회수1,40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1일 주일    

[대림 제1주일] 늘 깨어 준비하라 (마태 24,37-44)


12/1 대림 제 1주일 🔮 Hope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오늘, 교회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상이 끝나면 그것으로 우리 모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주님에게서 구원을 얻습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늘 깨어 있도록 합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민족들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제1독서 이사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3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고한다. (제2독서.로마13,11-14ㄱ)
 형제 여러분, 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12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예고 없이 올 것이므로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4,37-4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이사2,1-5)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4)

 이사야는 2장 2절에서 종말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성전으로 모여들 것을 예언하였고, 2장 3절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제 2장 4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날에 주님의 판결로 인해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당신의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면 온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희망에 찬 예언이 제시된다.

여기서 평화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원죄와 완고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하느님의 옥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옥좌에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 원수되었던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에게서 내려오는 평화를 나누어 갖게 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로 볼 수 있다.

전쟁의 무기를 모두 농기구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는다는 예언이

바로 메시야 시대에 이루어질 완전한 평화를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하더라도 이것은 장차 메시야에 의하여 이루어질 평화시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으로 이 땅에 시작된 메시야의 통치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성취될 메시야의 통치로 인한  완전한 평화의 시대를 내다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와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는 같은 뜻의 대구 구조를 이루는 문장이다.

앞의 것민족(나라)들 사이의 분쟁 해결의 측면을 강조하고, 뒤의 것 잘못을 어긴 자들, 각 개인을 바로 잡는 교정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재판관이 되시고'에 해당하는 '웨샤파트'(weshapat)'심판관이 되시리라'에 해당하는 '웨호키아흐'(wehokiah)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 행위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이 구절에서 주님의 통치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는 전쟁이 전혀 없는 완벽한 평화를 구가하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칼과 창은 전쟁때에 필요한 무기이지만, 보습과 낫은 전쟁이 없는 평화 시기에 필요한 농기구이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참전한 자들이 평화로운 때에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하고, 또 농사일을 하다가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쟁터로 나가곤 하였다. 

따라서 농기구를 잡은 손이 무기를 잡게 되고, 또 무기를 잡은 손이 농기구를 잡게 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미래의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미래의 평화 시대를 예언했을 것이다.

'보습'(plowshare)은 쟁기의 술바닥에 맞춰 끼우는 삽처럼 생긴 쇠조각을 말하며, 씨를 뿌리기 위하여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리고 '낫'(pruninghook)는 곡식을 추수할 때 이삭을 자르는 도구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전쟁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칼과 창을  파종과 추수때 사용하는 농기구로 만들 것임을 지적하여, 더 이상 살상무기가 필요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평화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와 마찬가지로 본문은 절대적 부정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부정어 '로'(lo)가 이끄는 문장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같은 뜻의 대구를 이루는 강한 부정문을 반복 사용하여 두 번 다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민족들 사이의 전쟁이 그칠 것이며 완전한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 예언은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가까워질수록,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발할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예언(마태24,7)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모든 분쟁과 싸움, 다툼이 종식되는 완전한 평화, 곧 그리스도 재림 후에 이루어질 평화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깨어있음은 사랑을 삶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늑대가 양 무리의 어린양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무리에 끼어 있으면 그 양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 인척 흉내 내며 늑대 무리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지난 해 내 욕하고 다녔지?”

어린양이 대답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자 늑대가 말합니다. “그러면 네 형이었나 보지.”

“전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네 가족 중에 누구였을 거야.”

“저희 가족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아요.”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어린 양인 자신이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늑대는 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잡아먹었습니다. “어, 상관없어. 이젠 저녁시간 다 됐거든.” 

우리 안에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 나는 정신없이 그것과 대화하다가 무리를 이탈하고 맙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 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 안에는 항상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이고, 한 목소리는 이웃을 죽여 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한 목소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이웃이 나를 이용해 이득을 보게 하라는 목소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한 목소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라는 목소리와 대화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그 목소리를 내는 것에게 영원히 잡아먹힙니다.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늘 깨어 있지 못한 것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첫 날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타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알려주러 오신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습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과 인간 평등의 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원칙으로 삼고 살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오심이 곧 심판이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치 노아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방주를 만들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 목소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를 짓지 못한 이들은 심판 때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온 사람은 마지막 때에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작은 심판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목소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의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원칙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 원칙이란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원칙을 깨고 누군가 미워지는데도 용서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배를 만들지 못해 결국 물속에 잠기고 맙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사랑을 지켜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될 방주를 만들어야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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