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대림 제1주간 화요일]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1-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02 조회수1,578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3일 화요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10,21-24)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고 한다. (이사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8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화답송 시편 72(71),1-2.7-8.12-13.17(◎ 7ㄴㄷ 참조)
◎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 그의 이름 영원히 이어지며, 그의 이름 해처럼 솟아오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고, 그를 칭송하게 하소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하신다. (루카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11,1-10)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1~2)

 

오늘 독서의 말씀의 앞 부분에 이사야서 10장 33절이 있다.

"보라, 주 만군의 주님께서 무서운 힘으로 가지들을 잘라 내신다.  높이 솟아 오른 것들은 잘려 나가고, 드높은 것들은 거꾸러진다."

 

삼림을 가지치기하고 솎아내는 산림 감독관의 비유를 통해 아하츠가 통치하던 불안한 시대를 묘사한다.

동시에 나라의 분할과 축소된 왕권, 부러지고 잘린 왕조를 묘사하는 단어가 이사이의 그루터기다.

 

'그루터기'에 해당하는'게자'(gueza)는 나무나 풀 따위를 베고 남은 밑동을 말한다. 

그런데 '햇순'에 해당하는 호테르'(hoter)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나고, '새싹'에 해당하는 '네체르'(necher)가 그 뿌리에서 나온다.

 

햇순과 새싹이 새로운 왕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그루터기와 뿌리에서 나온다.

이사이의 자손들이 새 생명을 얻음으로써 다윗 왕조가 소생하는 것이다.

그 위에 생존과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영이 머무른다. 주님의 영은 왕에게 다스리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부여한다.

 

'지혜'(sapientia)와 '슬기'(깨달음; intellectus)는 임금에게 요구되는 기본 자질이다.

임금으로 하여금 선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자질이 '지혜'이며,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깊은 지적 통찰력으로 정책을 수립하는데 요구되는 자질이 '슬기'이다.

 

'경륜'(의견; consilium)과 '용맹'(굳셈; fortitudo)은 잠언 8장14절과 이사 9장 5~6절에도 나온다.

"나에게는 조언과 통찰이 있다. 나는 곧 예지이며, 나에게는 힘이 있다." (잠언8,14)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라.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위에  놓인 그 왕국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키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이다." (이사9,5~6)

 

'경륜'은 나라를 위한 전략 구성, 전쟁과 정책의 계획 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며, '용맹'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주도하는 임금이 가져야 할 힘과 담대함을 말한다.

 

'지식'(scientia)과 '주님을 경외함'(두려움;경외심; timor)은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용어이다.

'지식'은 주님과 주님의 뜻에 대한 참된 이해와 관계를 말하고, '주님을 경외함'은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 가운데 계시며, 오직 경배만 받으셔야 하는 거룩한 하느님께 임금이 드리는 근본적인 경외와 복종을 묘사한다.

 

교회는 위의 6가지에다 '효경'(pietas;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알아서 사랑하게 하는 은혜)를 합쳐서 '성령 칠은'을 가르친다.

위의 것들은 왕권의 카리스마적 특성나타낸다.

 

이렇게 주님의 영이 내리면, 주님의 영이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를 통해 말하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주님의 경외함으로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는다(3절).

힘없는 이들과 이 땅의 가련한 이들에게 베푸는 정의(공의)가 가능해지는데, 하느님께서 재판과 심판에 관여하시기 때문이다.

 

'입에서 나오는 막대기'는 법령을 의미하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은 질서정연한 사법 과정을 말하는데, 주님의 권능이 이 둘을 통해서 표현된다(4).

 

'정의'(공의)와 '신의'(성실)이 허리와 몸을 두르는 띠가 된다는 말이 11장 5절에 나오는데, 이것은 11장 6~8절에 드러나는 평화의 질서의 선행 조건이다.

'정의'와 '신의'는 선한 임금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오는 것이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6~8)

 

목축 생활의 평화로움과 평온을 그리는 이 묘사는 가축을 돌보는 목동이 아침에 양, 염소, 송아지들을 모아 풀밭으로 인도했다가 저녁에 다시 몰아서 데려오는 관습에 의존한다.

풀을 뜯어먹은 다음 가축들은 뜨거운 햇볕을 가릴 그늘을 찾아 풀밭에 눕는다.

 

사무엘 1권 17장 34~37절에 다윗이 아버지의 양떼를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킨 이야기가 나오듯이, 성경의 기사들은 이 직업의 위험들을 반영한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젖 떨어진 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어떠한 위험도 해악도 없는 세상을 강조한다.

 

'나의 거룩한 산'(9)의 표상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 재창조하신  세상의 완전함을 암시한다.

주님의 영에 의해 전달된 '주님을 아는 지식'('주님을 앎으로'; 9절ㄴ)은 '땅'(온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의 성소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주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와 헌신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관계와 헌신에 의해 주님과의 친교가 가능하고, 어디에서나 주님의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된다.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 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10절)

그날이 오면, 분열되고 분할된 다윗 왕조가 파기된 그 기능을 회복하고, 다윗 왕조에 영광이 되찾아지게 된다.

 

임금이 자신의 야망과 욕심과 능력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통치하지 않고 주님의 영을 받아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백성들을 다스릴 때, 예루살렘에 주님의 분명한 임재와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 예언서는 도래하는 메시아 왕국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평화의 왕국을 예언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평화의 반대인 전쟁과 분열, 불목과 투쟁이 활개치는 이 세상안에서, 평화와 일치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할 교회,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독서 말씀은 분명히 우리가 평화를 선물로 받으려면, 먼저 정의와 신의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영을 충만히 받아 주님의 영의 카리스마(특은)을 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소서 성령님!  오시어 저희에게 양심의 평화를 주시고, 저희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본당과 직장 공동체들과 이 조국에 평화와 일치와 사랑의 선물을 내려 주십시오.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0,21~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아루어졌습니다." (21)

 

루카 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신다.

여기서 '즐거워하며'에 해당하는 '에갈리아사토'(egalliasato; rejoice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높이다'는 뜻을 지닌 '아갈로'(agallo)와 '껑충껑충 뛰다'의 뜻을 지닌 '할로마이'(hallomai)가 결합된 합성 동사로서 '몹시 기뻐하다', '크게 기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기쁨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크게 즐거워하신 것은 예수님의 열린 영안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펼쳐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루카 복음 10장 21절과 22절의 말씀 또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서 신적(神的) 통교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에게 익숙한 구약적 표현으로서,

창세기 14장 19절과 22절에서 비롯되는데,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또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아람어 '압바'(abba)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간의 부자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매우 친근한 호칭인 것이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여기서 '이것을'로 번역된 '타우타'(tauta)는 가까운 사물이나 내용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후토스'(hutos)의 복수형으로서 '이것들'(these things)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즉 그가 베푼 기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나라의 복음 및 일흔 두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을 모두 다 가리킬 것이다(루카10,9.11절).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음을 대조법을 통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낸다.

 

'지혜롭다는'으로 번역된 '소폰'(sophon; wise)은 '지혜있는'을 뜻하는 '소포스'(sophos)에서 비롯되었고, '슬기롭다는'으로 번역된 '쉬네톤' (syneton;prudent)는 '지식있는', '이해하는'(마태11,25; 사도13,7)을 뜻하는 '쉬네토스'(synetos)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도 있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율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던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느님의 계시,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루카11,42~52).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대조되는 '철부지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철부지들'이라고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 little children; babes)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 ,즉 '편견과 아집으로 때묻지 않고 천진무구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율법이나 종교 위식을 엄밀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한 지혜와 보잘것 없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루카14,13.21.24).

이 구절은 전통적 유대 사상인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이다.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숨겨진 반면에, 영적으로 주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했던 세리와 죄인, 가난한 이들, 병자들, 소경들과 장애인들(루카14,21)에게는 계시로 나타나졌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18,3.4)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오늘의 묵상

대림 시기는 희망의 시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의 신탁은 다윗의 자손, 한 아이(“임마누엘”)의 탄생을 예언하였던 이사야서 7장, 9장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불의와 폭력의 정권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종살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라 죽은 그루터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언자가 꽃잎과 열매 맺힌 나무로 나타내는 풍요로운 미래의 희망은 더 이상 없습니다.바로 그때 예언이 따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말라 죽은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돋아납니다. 아직 작은 새싹이지만, 주님의 영이 주는 생명력은 왕성하며 지혜와 용맹으로 충만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일곱 영은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고, 힘없는 이들과 가련한 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에 일치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도와줍니다. 힘없는 이들을 위한 사랑은 온 공동체의 정의와 민족들 사이에서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입니다.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주님의 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민족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일구어 내는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중은 영광스러운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지만,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자한 사랑을 나타내는 겸손하고 단순하며 전적으로 다른 이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 모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 놓도록 합시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