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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1주간 금요일]소경 치유(마태 9,27-3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06 조회수1,96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6일 금요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소경 치유(마태 9,27-31)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날이 올 것이라고 한다. (이사 29,17-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정녕 이제 조금만 있으면 레바논은 과수원으로 변하고  과수원은 숲으로 여겨지리라.
18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19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20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성문에서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 자들이다.
22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으리라.
23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24 그리고 정신이 혼미한 자들은 슬기를 얻고  불평하는 자들은 교훈을 배우리라.”

 

화답송 시편 27(26),1.4.13-14(◎ 1ㄱ)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눈을 뜨게 해 주신다. (마태 9,27-31)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8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31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이사29,17~24)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18~19)

 

이사야서 29장 18절에서는 그날에 천민과 빈민이 선민의 신앙을 회복하고, 기쁨을 누릴 것이란 사실이 예언된다.

이사야서 29장 18절마태오 복음 11장 5절과 직접적으로 연관하여 해석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을 의심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간접적으로 답하셨다.

이사야서 29장18절의 예언의 문맥이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행해질 때 발생하는 일들과 관계되기 때문에 이러한 문자적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보다 더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은 비유적 해석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과거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던 자들이 듣고 깨달아 알게 될 것이란 예언이 된다.

여기서 '귀먹은 이'(못 듣는 자)는 순수 이방인과 유다 백성들 중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던 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들은 구약 계시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었으며,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 말씀에 관심이 없었던 유다 백성들을 영적 귀머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장차 듣게 될 '책에 적힌 말', 즉 '띠브레 세페르'(dibre sepher; the words of the book)는 문자적으로는 '책의 말씀들'이란 의미로서, 이사야서 29장 11절에 언급된 '봉인된 문서의 말씀' 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유다 백성들은 마음이 완악해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들이었다(이사6,9).

그러나 주님 구원의 날에는 그들이 죄를 회개하는 가운데 그들의 영적 소경됨과 귀머거리됨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에 해당하는 '우메오펠 우메호셰크'(umeophel umehoshek)는 점층적법 표현이다.

앞 단어 '오펠'(ophel)은 어스름하여 사물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하는 정도의 어두움을 의미하며, 두번째 단어 '호셰크'(hoshek)는 칠흑같이 어두운 흑암을 의미한다.

이런 장소에서는 눈이 성한 사람도 사물을 똑똑하게 볼 수 없다. 그러나 장차 맹인이 이러한 장소에서 사물을 분명하게 보게 된다.

여기서 어두움을 나타내는 이 두 표현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여 영적 어둠 속에 있는 유다 백성들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나 계시가 아예 없이 진리를 보지 못하는 흑암 속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의 거처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잇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날에 그들은 광명의 빛 가운데서 진리를 명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본절은 하느님의 구원이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강하고 부유한 자들이 기뻐하지 않고 약한 자들과 가장 가난한 자들이 즐거워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의가 짓밟힘을 당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멸시를 당하던 이사야 예언자 당대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왜곡된 세계를 뒤덮어 질서를 바로 잡으실 것이다.

한편 '겸손한 이'에 해당하는 '아나위임'(anawiim)의 원형 '아나우'(anauu)구약 성경에서 모두 23회 사용된 단어인데, '가난한 이'(시편7,19; 10,17), '가련한 이'(시편10,12), '겸손한 이'(민수12,3)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으며, 사람들이 보기에 성격이 거칠지 못하고 마음이 여리며 쉽게 노하지 않는 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마음이 완악한 자들, 거칠고 잔인한 자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기 일쑤이고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착취를 당하며, 세상의 기득권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그들은 탐욕과 부정한 이익을 쫓는 이 세상에서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대상은 주 하느님밖에 없다.

본문에서 '주님 안에서'에 해당하는 '빠이흐와'(baihha)의 기쁨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께 순종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가운데서 솟아나는 영적 기쁨이다.

그 기쁨을 누리는 자에게는 평화가 넘쳐나며 세상이 주는 어떤 염려와 근심도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여기서 '가난한 이' 해당하는 '예브요네'(ebyone)의 원형 '예브욘'(ebyon)물질적으로 매우 궁핍한 사람을 말한다.

세상에 의지할 것이 전혀 없어 오직 주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이들 가난한 이들의 기쁨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삐크도쉬; biqdosh)있음이 선포되는 것이다.

가장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어떤 물질적 축복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그분과의 풍성한 영적 친교 가운데서 기쁨을 찾게 될 것이다.

그들이 기쁨의 대상으로 삼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주 하느님,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죄와 어두움에서 벗어나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 가도록 이끄시며, 흠없고 티없는 순결한 백성으로 세우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거룩한 성품을 지니시며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세상의 죄와 어둠에 젖어 그것만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거룩함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거룩한 역사하심을 고대하고 희망하는 자들에게만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즐거워하리니' 번역된 '야길루'(yagillu)의 원형 '낄'(gyll)은 본래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펄쩍 팔쩍 뛰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는 하느님의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날을 고대하는 자들이 누릴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9,27-31)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28~29)

여기서 '믿느냐'로 번역된 원어는 '피스튜에테'(pisteuete; do you believe)이며, 이것을 직역하면 '네가 믿느냐'이다.

즉 원문이 이 단어를 본문 서두에 배치하여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가 아니고, '너희는 믿느냐'이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시는 다른 기사에서 주어진, 본문과 대응하는 질문'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이며(마태20,32; 마르10,51; 루카18,41), 이것은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9장 28절치유를 받는 자의 믿음이 강조될 뿐 아니라, 질문의 대상이 되는 두 소경은 앞에서 '다윗의 자손이시여'라는 호칭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한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본 단락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훈적 목적에서 기록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치유 기사에서 강조하는 것은 치유받는 이의 믿음인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의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제 마태오 복음 9장 29절을 보면, 두 소경의 치유 기적에는 행위와 말씀이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을 본다.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의 눈에 직접 손을 대시고, 또한 너희의 믿음대로 되라고 명령하신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치유가 되는데(루카7,7~10), 직접 눈에 손을 대셔서 소경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고, 반대로 손을 대기만 하셔도 고치실 수 있는데, 말씀을 통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눈이 떠져라'로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카타'(kata; according to)'~에 부합하게'라는 뜻이다(루카7,22; 히브7,5).

이것은 그 소경들이 자신들의 눈이 떠질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눈이 떠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복음적인 믿음은 모든 기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인(動因)과 바탕이 되는 것이다.

2016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매일미사에서)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영적으로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하고 인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줄 작품을 예언합니다.

많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주님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예언은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합니다.

피조물도 사람들이 마음으로 느끼는 변화의 은혜를 느낍니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이익을 얻으려고 땅을 제멋대로 다루거나 착취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언자는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보여 주신 충실한 사랑에 눈을 연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였던 것처럼 겸손한 이들은 주님을 유일한 안내자로 알아 모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친밀감을 느끼며 기뻐하는 가난한 이들이 겸손한 이들 곁에 있습니다.

믿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는 치유와 구원의 좋은 결실을 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 둘의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활동은 육체의 치유보다 더 심오합니다.

곧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믿음은 눈먼 사람 둘에게 육체의 눈을 열어 준 것이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눈먼 사람의 눈이 믿음으로 열린 것입니다.

 마음이 끌리는 사물만을 보는 우리는, 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려면 깨끗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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