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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12.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07 조회수1,80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이사 30,19-21.23-26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20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21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23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24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25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26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복음 마태 9,35─10,1.6-8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러분, 불행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아마 많은 분이 곧바로 ‘행복’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사전을 보다가

불행의 반대말에 더 가까운 단어는

‘다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긴 이런 관용구가 있지 않습니까?
‘불행 중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단어의 뜻은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과

반대말이 될까요? 사실 우리는 불행을

내 뜻대로 되지 못했을 때, 자신이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사전에서 이야기하는 불행은

그것이 아닙니다. ‘뜻밖에 일이 잘되지

않아서 운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사실 ‘다행’으로 다가오는 시간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내 생각과

달리 뜻밖의 경험으로 일이 잘 풀리는

 운 좋은 날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따라서 무조건 불행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불행의 기준을 잘못 세우고

있는 ‘나’ 탓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기준으로 힘들어하는 우리 편이

되어주시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정말로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분은 병자들이

당신께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복음과 그들의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가지고

몸소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어떤 독재자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재난과 혼란이

그들을 괴롭혀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까요?
강압된 통치로 인한 고통, 자연재해를

통한 고통 등으로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그래서 일상 삶 안에서의 기쁨을 깨닫지

 못하는 것, 여기에 율법의 짐까지

더해져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하시지요.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행복에 대한 나의

기준을 다시 세워봐야 합니다.

내 욕심을 채우지 못한 불행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참 행복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죄송한 마음.

신부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제게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신부들과 모임이 있을 때는

다른 약속도 모두 제쳐둡니다.

그런데 작년 9월에 있었던

순교자현양대회 때에는 신부들에게

충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교자현양대회 전날 신부들이 와서

좋은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것입니다.

솔직히 바쁠 것 같아서 다른 날짜를

잡으면 어떨까 했지만,

 다들 이날이 좋다는 것입니다.

전날 와서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제 방에서 함께 자고 다음 날 현양대회

 미사에 참석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계획은 훌륭했지만, 저의 상황이

 너무나 바빴습니다. 직원, 봉사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총 책임자인

저 혼자 놀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부들이 와도

반갑지가 않았고, 결국 모든 준비가

끝난 밤 10시 이후에나

볼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온종일

준비하느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너무 피곤했고 신부들을 뒤로하고

먼저 침대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한 번의 제 외면이 불편했었는지 그 뒤

신부들이 잘 찾아오지 않습니다.

 10번 잘하다가도 1번 잘못하면

계속 못 했던 것처럼 여겨진다는 말이

허투루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더 노력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잠자는 요셉이랍니다.

교황님 책상 위에 놓여있다고 하네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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