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 제2주간 화요일]되찾은 양의 비유 (마태18,1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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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9-12-10 | 조회수1,24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9년 12월 10일 화요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되찾은 양의 비유 (마태18,12-14)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한다. (이사 40,1-11)
화답송 시편 96(95),1-2.3과 10ㄱㄷ.11-12.13(◎ 이사 40,10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되찾은 양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마태18,12-14)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40,1~11)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를 간 이유는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신할 때,주변 이교 강대국(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등) 을 통해 전쟁을 일으키고, 나라 잃은 설움을 주거나 유배를 보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그들의 죄의 벌에 대한 (죗값; 갑절의 벌; 복역)을 치루고, 정신차리게 하며,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한다.
오늘 이사 40.1-2를 보라.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여기서 '나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정의할 수 있다. 바빌론 유배지에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복역의 때'가 끝났음을 외치라는 소명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의 지위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 요새화된 성은 다윗의 전투시 군사적 중심지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로도 수없이 많은 전쟁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전쟁은 국가 존립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이스라엘(북)과 유다(남)는 더 이상 국가로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주변 이교 강대 제국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자유롭게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 40.3-11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삶의 터전과 공동체에 주님으로 찾아오시고, 통치하실 수 있도록,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길을 닦으라는 말씀이 선포된다. 성전 전승에 의하여 잘 알려진 야훼의 길은 시내산이나 에돔에서 나와(이사 34장; 63.1-6 참고) 사해 남쪽의 사막(=아라바)를 지나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다(Diaspora가 거주하는 길).
이 선포의 핵심, 즉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유는 야훼께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 좌정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왕의 행차를 준비하라고, 한 외침(소리)이 촉구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마르코복음1장 2~3절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마음 준비를 하도록 구약과 신약의 교량 역할을 하며, 예수님 앞에 오셔서 정지 작업을 하는 소명을 받은 예수님의 선구자이신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사막에 길을 곧게 내는 것, 골짜기를 모두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하는 것, 거친 곳을 평지로, 험한 곳을 평야로 만드는 것" 이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정지작업은 높은 것을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는 작업이다.
하느님 위에 올라간 영적 교만은 겸손으로, 죄악과 분열과 열등감의 깊은 계곡은 회개를 통해 은총을 받을 그릇을 비하는 것이다. 거칠고 험한 곳은 주님께 반항하고 대들고,제 마음대로 하던 마음인데, 그 폭력과 고집의 마음을 겸손과 온유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주님의 영광" (이사40.5)이 드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다함께 보게 된다고 한다.
하느님 임재와 능력의 표징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볼 수 있고,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40.9ㄹ-10ㄴ). 상급과 보상이 무상으로 내린다(10ㄷ). "상급"과 "보상"은 승리한 전사가 집으로 가져오는 노획물과 공물을 표현하는 어이다. 야훼 하느님의 예루살렘 귀환이 승리의 행사로 묘사된다.
그분은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양무리)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이스라엘 백성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지도자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40.11). 이 목자와 양무리에 대한 시구는 시편 23.1-3과 유사하다. 목자는 대개 "왕"을 위한 비유로 쓰인다. '그의 양무리, 어린 양, 암컷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넓은 의미로 묘사한 것이다.
유다의 성읍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수십 년동안 외면과 고통스런 상황으로 고난 받아온 사람들을 묘사한다. 예루살렘에로의 하느님의 귀환은 그들 모두, 특히 약한 자와 곤궁에 빠지고 궁핍한 자를 위한 목자의 외투 속 사랑을 가리킨다. "젖먹이는 암컷들"은 "갓난 어린양들"과 함께 지내며 돌보는데, 양떼가 이동할 때마다 어린양들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림 제2주간 화요일 복음(마태18,12~14)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2)
'길 잃은'에 해당하는 '프라노메논'(planomenon; which is gone astray; that wandered off)의 원형 '플라나오'(planao)는 '길을 잃다'(to go astray), '방황하다'(wander roam abou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실제로 양은 심한 근시이므로, 무리와 조금만 떨어져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길 잃은' 양도 무리로부터 떨어져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 애처롭게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단어는 은유적으로 '속이다' '유혹하다', '꾀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수동형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18장 12절은 자신의 잘못에 의해 길을 잃게 된 행위 뿐 아니라, 유혹당하여 진리로부터 벗어나 죄에 빠지게 된 상황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않느냐?'에 해당하는 '우키'(ouchi)는 '아니다'(not)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부정어이다.
하지만 본문처럼 의문문에서 사용되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본문은 '반드시 그 한 마리를 위해 나머지를 버려두고 찾는다'라는 뜻이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그냥 남겨 둔다는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되지 않지만,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자들에 대해서는 한 영혼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소중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착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 한 마리일지라도 크나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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