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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안식 (마태 11,28-3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1 조회수1,26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11일 수요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안식 (마태 11,28-30)

 

 

하느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워 주신다. (이사 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8과 10(◎ 1ㄱ)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다. (마태 11,28-3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40,25~31)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25)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26)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 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7)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31)

 

이스라엘은 지금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있으며, 더 이상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민족의 형태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불신과 의심과 회의자신의 비극적인 현실적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음을 보는데 근거한다.

 

이교 강대국은 여전히 굳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직도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이다. 

예루살렘은 페허 상태이다.

정말로 인간(육체) '풀'이다(이사40,6~7).

 

제국의 장악하는 힘이 약해지거나 혹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의 힘이 강해진다는 아무런 희망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라고도 불리는 불신의 자리에 빠져 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확신을 주시기를 원한다.

그들이 아는 주변 강대국들과 하느님을 비교하려는 그들의 계획에 귀기울여 주시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그들 자신의 명세서에 맞추어 주시기를 바란다.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 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7)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영원한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공격하면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일시적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과소 평가하고 또 판단했다.

하느님을 판단하려면, 차라리 별의 시간이나 공간을 통하여 판단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차원이다.

 

별들을 공간 안에 두는데 걸리는 시간, 별들이 이동하고 존재하는데 요구되는 거리를 인간이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차원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25~26) 

인간이 풀과 들의 꽃처럼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이며, 연약하고 무력한 것이라는  불평과 원망에 맞서서 포커스를 하느님께로 맞춘다. 

 

주님은 긴 안목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다.

그 표현이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28)이다. 

그분의 계획은 순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땅끝까지 창조하시는 분'이란, 그분의 창조적 활동이 특별히 정해진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원대한 거리의 땅 전체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느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바빌론에도 해당됨을 배우고 있다.

 

이스라엘의 시간 감각은 당장의  만족만을 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긴 시간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28)

그분은 수 십년, 수 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신다.

 

이제 논쟁은 이사야서 40장 6~7절에로 돌아간다.

거기서 이스라엘의 인간성 '시드는 풀''지는 꽃'으로 묘사되는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신다.

그러한 연약함과 무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힘)과 기력(힘)을 제공하신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29)

바야흐로 최선의 상태에 있는 사람일지라도(젊은이들과 청년들) 피곤하여 지치고 비틀거릴 수 있는 인간적 상황 가운데서(30), 하나의 특별한 무리가 '보다 새롭고 위대한 활력'을 가지고 달려 나간다.

이들은 '주님께 바라는 이들'(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바라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와'(qawa)'기다리다'(wait for) 혹은 '바라다'(hope)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개념이 중첩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다리는 희망'혹은 '희망에 찬 기다림'을 가리킨다.

마치 해바라기가 태앙만을 바라보듯이 늪에 빠져서도 눈과 코와 입을 하느님께로만 두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31)

 

높이 나는 독수리는 자신의 강한 날개 때문에 높이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날개를 받처 주는 기류 때문에 떠 있는 것이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주님을 앙망하는 자들)이란,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영(성령)에 의해서 들려져서 높이 날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을 말한다. 

 

아무런 희망의 끈이 보이지 않는, 연약함과 무기력의 인간 한계를 체험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계획을 끝까지 '기다리고', '희망'(바람)하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러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태도 고통의 극한적이고 절망적인 순간을 뛰어 넘어서 위로 올라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지치지도 피곤하지도 않으며, 게속 전진하게 한다.

 

하느님의 시간은 우리 인간의 시간이 아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하느님의 방법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을 새롭게 할 것이고, 달려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공동체 698번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가 말씀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가지로 힘듦을 체험하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대림 제2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 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을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리서3~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카이'(kai; and)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한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마태5,5).

그리고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 (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셨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2013년 가해 대림 제2주간 수요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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