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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 대림 제2주간 목요일]폭행 (마태11,11-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2 조회수986 추천수0 반대(0) 신고

 

 



[(자) 대림 제2주간 목요일]폭행 (마태11,11-15) 

 

하느님께서는 온갖 죄로 벌레와 구더기 같은 삶을 살아온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자처하시며 당신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사 41,13-20)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화답송  시편 145(144),1과 9.10-11.12-13ㄱㄴ(◎ 8)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세례자 요한은 모든 예언자가 그러하듯이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마태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사41,13-20)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은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5)

이사야서 41장 15절과 16절에서 주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을 주님의 타작기로 삼으시고 영광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농사가 끝난 이후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타작은 심판의 양상을 나타내는 예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고대 근동에는 두 가지 타작 방식이 있었다.

하나소가 돌리는 육중한 맷돌을 이용해 타작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사람이 끝이 날카로운 타작기계를 손에 쥐고 타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타작하는 방식이다.

본문은 후자의 방식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이방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자기 손에 들린 타작기로 삼는다는 것은  이방 사람들을 파괴한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로 갈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해 내는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을 암시한다.

본문은 종말론적 상황과 관련하여 장차 영적 이스라엘로 세워질 교회와 그 성도들이 만왕의 왕, 만민의 주님으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며,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나타내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마태19,28).

한편 앞선 이사야서 14장 14절 상반절에서 이스라엘은 '벌레', 즉 지렁이처럼 사람이 밟고 지나가면 터져서 죽는 초라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날카로운 타작기',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묘사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급작스런 변화, 너무나도 상이한 대상묘사한 것이 아닐수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일으키는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주 하느님이시며, 그분이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임을 약속하셨기에 이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시행된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이다. 아울러 이러한 일로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될 시점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그 때가 가까워오고 있으며, 실제로 하느님께서 행하신다면, 사람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라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부수고, 언덕들은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본문은 앞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된 결과, 이루어질 일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과거 '벌레'같은 존재로서 이스라엘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산들과 언덕들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방인들, 이방 국가, 이방 권세자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으로 강해진 그들,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처럼 견고하게 된 그들은, 산같은 힘을 가진 압제자들을 부스러기나 겨와 같이 흩어버리고, 그 압제를 통해 해치고 말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먼저 제시된 '산들'에 해당하는 '하림'(harim)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자들 가운데 큰 세력을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이를 쳐서 부스러기로 만든다는 것은 영적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불신자들 가운데서 산들처럼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한 자들을 심판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이어 제시되는 '언덕들'은 앞서 나온 '산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적대하는 불신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의 영향력이 미미하더라도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산들'과 대비되는 '언덕들'에 해당하는'우게바오트'(ugebaoth)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언덕들은 '지푸라기'(겨)같이 될 것인데, 본문에서 '지푸라기'(겨)에  해당하는 '모츠'(mots)탈곡한 곡물 가운데서 알곡이 빠져 나와 버린 쭉정이, 껍질, 왕겨를 의미한다.

이러한 본문이 전달하는 표면적 의미 이스라엘이 강성하여 주변 여러 나라들을 허무하고 무가치한 부스러기나 '지푸라기'(겨)처럼 만들어 버리며 짓밟을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그만큼 강하게 성장하고 영예로운 지파에 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세례자 요한이 그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활동이 그러하였듯이 하느님 말씀을 증거하는 성도들은 높은 산을 낮추며, 거만한 자들을 하느님의 권세와 그 말씀 아래 굴복시키는 일을 행할 것이고, 하느님의 권능 앞에서 악인들과 불신앙적인 삶을 사는 교만한 자들이 얼마나 무력하고 초라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1,11~15)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2)

여기서 '폭행을 당하고 있다'로 번역된 '비아제타이'(biazetai)는 '강제로 들어가다'(루카16,16),'폭력을 쓰다'(apply force)등의 뜻을 가진 동사 '비아죠'(biazo)의 현재 중간태 내지는 수동태이다.

또한 '폭력을 쓰는 자들'로 번역된 '비아스타이'(biastai)도 같은'비아죠'(biazo)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이것을 성서학계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한다.

첫째로, 긍정적인 의미로 '용기있는 자' 혹은 '몹시 단호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임박해 오는 천국을 향하여 돌진하는 강력한 제자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업과 가족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에 의해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과 신약의 교량 역할을 하며, 오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맞이하도록 마음 준비를 시킨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 시절부터 천국에 서로 들어가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과 희생을 기울이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루카16,16)

둘째로, '비아스타이'(biastai)는 한번도 그리스도교 안의 문서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적이 없기에 부정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그것은 'men of violence'(the violent)라는 뜻으로 바리사이인들, 악한 영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 안티파스, 그리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 즉 적대자들에 의해 하느님 나라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고난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

'세례자 요한때부터'라는 말 속에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데, 하느님 나라는 그 도래함이 선포되는 그 순간부터 벌써 강력한 반발에 휩싸였고, 고난을 동반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가 지금까지 함께 내려 온다.

어쨌든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하느님도 천국도 믿지 않는 세속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천국과 하느님의 옥좌를  바라보며 그분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해야만 한다.

또한 동시에 주님의 진리와 정의, 생명과 사랑의 가치관을 추구하다 보면 세속의 가치관과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여 그들로부터 오해와 박해, 고난을 필연적으로 당하게 됨으로, 그 고난을 주님과 주님의 섭리안에서 고찰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기꺼이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이제 교회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룩함과 절대적 생명을 가진 하느님의 말씀과 정통 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하느님 중심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이 그것이다.

즉 세속화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로서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눈에 안보이니 눈에 보이는 사람을 섬겨야 하고, 사람안에 있는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젠가 없어질 이 땅에 자신의 힘으로 하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며, 겉으로는 하느님 이름을 거론하고 애덕실천, 사랑타령을 하지만, 그속엔 진정한 하느님 사랑과 흠숭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절대적 생명의 말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교회를 다스리는 인본주의 사상을 지닌 자들이다.

바로 이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인데, 이들은 교회안에서 이미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고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사상을 가지며 전통적인 전례와 거룩한 신심을 추구하는 교인들을 퀘퀘묵은 정신을 가진, 시대에 뒤떨어진 자들로 치부하며, 그들을 교회안에서 의도적으로 몰아내고, 고난과 박해를 서서히 행사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것도 두려워 할 것도 없다. 그들은 사람이며, 그들안에 역사하는 악한 영들도 하느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시기(묵시1,8)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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