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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불륜, (루가16:1~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6 조회수1,45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1.16.

하느님의 불륜, (루가16:1~18)



(루가16:1~18)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16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 17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 18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가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 부르는 그런 비유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청지기를 주인에게 고발을 해 버렸습니다. 이유인즉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주인에게 참소가 들어왔고, 주인은 그 고발 내용의 진위를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청지기를 불러서 그가 하던 일을 정리하고 그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지기가 고민을 합니다. 그가 그 일을 그만두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長苦 끝에 惡數를 둔다고, 그 청지기는 고민 끝에 자신이 맡아 관리하던 장부를 들고 빚쟁이들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이자의 부분과 보험료의 부분을 다 깎아줍니다.

당시는 고리대금업이 율법으로 철저하게 금지가 되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용의주도한 유대인들이 돈이나 물건을 차용하게 되면 미리 이자까지 합하여 차용증서를 썼습니다. 요즘도 사채업자들이 그런 방법을 아주 애용하지요? 돈을 빌려주면서 미리 선 이자를 떼고 나머지 차액만을 주면서 차용증서에는 원금을 그대로 적는 그런 방식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올리브유의 이자가 100%였고, 밀의 이자가 25%였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50말 빌린 사람은 100%의 이자를 보태서 100말을 빌린 것으로 차용증서를 썼고, 80석을 빌린 사람은 25%의 이자를 보태서 100석이라 썼던 것입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을 불러서 그 이자의 부분을 깎아 준 것입니다. 아무리 관리인이라지만 그 장부는 주인의 것이고, 채권 또한 주인의 권리이며, 빚 또한 주인의 자산입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는 자기 마음대로 이자를 깎아 주고 그 일로 인해 자신이 해고당한 이후의 삶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너무 서둘러, 주인의 돈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나 물질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행위를 연결시켜, 그것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라고 결론을 지어 왔습니다. 맞습니다. 그 이야기도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앞 뒤 문맥 속에서의 이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는 그와는 비교도 할 수없는 감동적인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먼저 오늘의 비유가 어떤 문맥 속에 들어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에 이어지는 비유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행의 내러티브 속에 들어있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루가복음 15장과 16장에 기록된 그 다섯 개의 비유를 연속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에 착안을 해서 이 비유를 다시 해석해 보았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연속적으로 말씀하신 다섯 개의 비유 중 네 번째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섯 개의 비유는 하나의 맥으로 통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주님은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버려둔 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던 그 목자 안에 당신을 투영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에 의해 찾아진 그 양의 찾아짐을 회개라는 단어로 감싸 안으십니다. 양은 당신이 찾으셨는데, 양은 그저 각기 제 길로 간 것밖에 한 일이 없는데, 주님은 그 양이 자진하여 회개를 했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도 주님은 찾아진 드라크마를 의인화하여 그 드라크마가 회개를 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회개의 정의를 다시 내리게 되었지요?

 회개란, 세상의 삶의 방식 속으로 내 던져진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 나서신 예수님에 의해 찾아진 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로 돌아와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채색이 되어져 가게 되는 모든 과정을 다 포함하여 회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개는 하느님 측에서의 선택과 찾으심과 부르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의 주도권은 우리 성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그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일에, 회개를 하는 일에,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에 의해 찾아지기 전까지 이 세상의 돼지우리 됨, 이 세상 힘과 가치의 쥐엄 열매 됨’,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세상 힘과서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돼지는 이들의 돼지 됨을 처절하게 배우고, 경험하고, 깨달아 알 돌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상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찾아진 다음에도 우리는 그 돼지우리의 삶과 쥐엄 열매의 추구 속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돼지의 삶을 계속 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매 순간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고, 매 순간 돼지우리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며, 매순간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서도, 회개를 한 성도의 삶 속에서도, 돼지의 삶이 그렇게도 자주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실수와 넘어짐을 다 품어 안는 것이 하느님의 은혜요, 자비,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는 더욱 더 교묘하게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고 있는 큰 아들까지도 보듬어 안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그렇게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둘째 아들, 잃어버린 첫째아들을 찾아 나서시는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게 두 아들과 아버지의 비유였습니다.

 그 두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연이어 나오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것이라면 이러한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 속에서 갑자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자가 튀어 나오면 안 되잖아요? 두 아들의 비유에서 그 둘째 아들이 어떻게 살았지요?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청지기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며 살았습니다그 두 단어가 디아스코르피조로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비유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비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시 이 비유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를 발견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것도 한층 점층 되어 강조가 된 그런 은혜와 자비.

저는 그동안 이 비유를 예화로 쓰면서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청지기를 변호하고 감싸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었습니다. 그가 한 행위를 어떻게 해서든 보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이자는 원래 주인 것이 아니니까 그 청지기가 이자를 감해 준 것은 주인의 것을 허비한 것이 아니다, 주인은 원래 너무 부자라서 그까짓 이자 조금 깎아 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등의 억지 변호를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변명을 갖다 붙여도 그건 전혀 의로울 수는 없는 행위가 맞습니다. 그건 절대 칭찬받을만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불의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본문 8절에 나오는 칭찬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헬라어 에파이네오를 번역한 것으로, ‘찬양하다, 칭송하다, 기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찬양은 원래 누구의 것이어야 하나요?

(묵시5:12-13)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여기 보시면 영광과 찬송이 누구의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에게만 영광과 찬송과 존귀와 능력이 세세토록 돌려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 찬양이 불의한 청지기에게 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에게 지혜롭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이 지혜 프로니모스라는 단어는 종말론적 언어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 비유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축약 할 수 있는 구속사적 유비라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프로니모스라는 헬라어는 히브리어 소피아즉 종말을 당겨 오신 예수라는 지혜와 연결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 전체에서 지혜라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잠언8:11~17) 11 지혜는 산호보다 낫고 온갖 귀중품도 그것에 비길 수 없다.” 12 “나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 살며 지식과 현명함을 얻었다. 13 주님을 경외함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의 길을, 사악한 입을 미워한다. 14 나에게는 조언과 통찰이 있다. 나는 곧 예지이며 나에게는 힘이 있다. 15 내 도움으로 임금들이 통치하고 군주들이 의로운 명령을 내린다. 16 내 도움으로 제후들이 다스린다. 의롭게 판결하는 수령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17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 주고 나를 찾는 이들을 나는 만나 준다.

여기보시면 지혜가 , 지혜는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고 훈계까지 합니다. 그 지혜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3:14~18) 14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 15 지혜는 산호보다 값진 것 네 모든 귀중품도 그것에 비길 수 없다. 16 지혜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그 왼손에는 부와 영광이 들려 있다. 17 지혜의 길은 감미로운 길이고 그 모든 앞길에는 평화가 깃들어 있다. 18 지혜는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 그것을 붙드는 이들은 행복하다.

지혜가 곧 생명나무랍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 종말론적 언어로 쓰였던 프로니모스가 이곳에 쓰인 것으로 미루어, 종말을 역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신 예수의 지혜가 이곳에서 설명이 되어 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불의한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범법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담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불의한 청지기가 어떠한 모양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이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자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이 비유와,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 사이에 들어있는, 밑도 끝도 없이 당혹스럽게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루가16:13-18)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16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 17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 18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오늘 비유와 이 대목이 잘 연결이 되세요? 왜 갑자기 율법이 나오고 간음이라는 죄가 거론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다리로 하여 19절부터는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청지기 비유와 나자로의 비유를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접촉점인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루가복음 15장의 다섯 비유의 배경을 기억해야 합니다.

(루가15:1-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이 다섯 비유들의 주된 聽者는 부정한 자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율법의 대표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물론 이야기 도중에 청자(聽者)가 제자들로 바뀌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리를 옮기셔서 제자들에게만 몰래 말씀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로 대표되는 교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 악센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다섯 비유 중의 악센트가 바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잘 보세요. 지금 이야기의 聽者이자 그 비유속의 주인공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 그리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들과, 자기들의 義를 의지하며 그 義를 과신하고 과시하고 있는 율법의 대표들입니다.

지금 루가복음 15장과 16장의 다섯 비유는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와 율법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로만 말미암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 어떤 잡티도 개입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의로운 행위나 선한 일도 그들의 구원에 전혀 조건과 근거로 개입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에서는 잃은 것을 찾아가는 주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고, 세 번째 비유에서는 죄인의 방탕함(둘째 아들)과 율법의 교만함(첫째 아들)을 다 아울러 품으시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비유인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불의한 청지기를 용서하는 주인의 자비와 은혜가 더욱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 비유의 주인공 또한 불의한 청지기가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를 용서하는 주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의 비유들의 주인공이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는 주인들이며 아버지이니까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율법과 행위, 그리고 은혜와 자비의 극명한 대조가 이 비유들의 주제이기에, 네 번째 비유와 다섯 번째 비유 사이에 갑자기 율법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부분을 보시면 주님께서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예언자의 때가 세례요한까지에서 끝이 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복음이 전해져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침노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의 시대가 가고 은혜의 시대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시대에도 율법으로 하느님 나라를 밀고 들어오려 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율법의 한 획이 없어지는 것보다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쉬우니라) 율법의 요구가 누군가에 의해 충족이 되고, 그로인해 어떤 제한된 무리에게서 율법의 고발로 인한 불의가 소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음을 듣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할지라도, 율법의 요구가 그들에게는 여전히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그 나라를 침노하고 싶어 한다 할지라도 침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비유들이 시작이 되는 루가복음 15장 서두에서 율법을 상징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주님은 그들의 고발을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다시 한 번 반추시켜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누군가로부터 그의 불의를 고발당했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그는 그 율법의 고발로 완전한 죄인으로 판결이 될 판입니다. 주인의 심판이 예고가 되어 있고, 거기에 고발장이 접수되어 있습니다. 그건 이 역사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처한 공통된 현실입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행해야 하며,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오늘 이 비유의 주된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법에 의해 고발이 된, 그 불의한 자가 말도 안 되는 어떤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의 행위를 지혜라고 칭찬합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어떤 지혜입니까? 율법에 의해 불의한 자로 고발이 된 그 상태에서 계속 불의한 자로 폭로되어 버리고 인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의함이 고발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의 꾀를 동원하여 계속 불의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은 계속해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건 불의입니다. 만일 주인에게 그 사실이 발각이 되면 자신은 벌을 두 배나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장부를 정리하고 심판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또 다시 불의를 저지른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에게 무슨 배짱이 있는 것입니까? 주인의 은혜와 자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고발이 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직시하고, 그것을 고쳐내어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불의를 폭로 당했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꾀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있는 자신의 불의함을 자각하고 인정하며 주인의 자비와 은혜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불의한 청지기는 율법에 의해 고발이 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의 자비와 은혜에 자신의 몸을 맡겨 버립니다. 주인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걸 주인이 지혜라고 칭찬을 한 것입니다. 그 칭찬은 찬양이라고 했지요? 그 찬양은 누구의 것이라고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청지기의 지혜가 바로 예수님의 지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예수님의 지혜가 됩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율법에 의해 살해당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대명사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주의에 의해 살해당하신 것입니다. 율법이 그분을 불의하다고 고발을 하자 예수님이 변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고발을 그대로 수긍해 버리시고 불의한 자가 되셔서 그 고발 사건에 대한 벌을 받아 죽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살려내지 않으시면 계속 무덤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 자리까지 낮아지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품으신 불의는 우리 성도의 불의입니다. 그러함에도 주님은 하느님께서 품어 안으라고 하신 불의를 그대로 품어 안으시고 스스로 불의한 자가 되심으로 하느님께 순종과 충성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고 그 분의 자비와 은혜를 굳게 믿으며 그 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고발을 당하셨습니다. 왜요? 바로 진짜 불의한 우리를 고발하는 율법의 참소를, 죄 없으신 당신이 불의한 자가 되심으로, 진짜 불의한 자들을 살려 내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비이며 그게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에 자신을 던져버림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의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 예수님 당신이, 불의한 자리로 내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성을 하셨단 말입니다.

 너는 내 백성들의 모든 죄를 덮어 쓰고 불의한 자가 되어서 그들의 불의를 상쇄시켜라는 하느님의 뜻에 주님이 완전히 순종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건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고,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그 속에서 이루어질 완전한 연합의 순종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이며, 세상의 율법 관으로 볼 때 불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고, 남의 것에 충성하고, 불의한 것에 충성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건 다 우리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의 것에 충성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는 바로 우리 성도들 모두의 불의의 자리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하도록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불륜을 저지르고 간음하는 자들, 바로 우리의 자리였던 자리, 불륜의 자리가 죽음으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자리, 불의의 자리, 간음의 자리, 불륜의 자리는 원래 우리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은 흙이었습니다. 그 죽은 흙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환골탈태하게 됩니까? 하느님의 진짜 아들이 간음한 자, 불륜을 저지른 자가 되셔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고후8:9)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 원리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의 속성이며, 성품이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직접 불의한 자리로 내려가시면서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은혜만을 구해야 하는 자리로 옮겨 앉으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보며, 불의한 자, 패역한 자, 율법을 어긴 자라고 고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가 그 불의, 모든 하느님 백성들의 불의를 한 그릇으로 받아낸, 그 불의를 덮어 버리시고,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로만 그 불의를 의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불의의 핏 값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비유의 결론이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부활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요한15:12~16)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확인도장을 찍으십니다. 너희가 내 친구가 된 것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창세전에 하느님의 선택 안에 들어있던 자들만을 위해 그들의 불의를 모두 끌어안고, 아버지께 충성을 한 것입니다. 그게 스스로 불의의 자리로 내려간 불의한 재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핏 값으로 친구를 사귄 예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비유의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지혜, 복음의 비밀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의해 고발이 되면, 그것을 보상하고 회복하려 애를 씁니다. 그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라는 것은 모든 세상의 죄인들이 쏟아내는 오물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도 선악의 판단을 할 능력이 존재하며, 그 판단된 선악을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구별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죄이며 악입니다. 죽은 흙들은 율법에 의해 자신의 죄가 고발이 되면, 무조건 주인의 자비와 은혜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그 자신이 부인이 되면 그 안에 잉태된 새 생명의 삶이 밖으로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율법주의자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불의를 의로 회복시키겠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죄인의 교만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당신의 힘을 사용하여 문제 해결을 하려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과 시키시는 말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와 자비의 반대편에 있는 모든 인간의 교만과 행위와 사고와 시도들을 맘모나스’ ‘세상 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맘모나스라는 단어를 성경이 , 재물등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갑자기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루가16:13)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의지하는 자들이, 어찌 자신의 힘과 판단과 계획과 노력과 선악구조를 의지하여 율법의 고발을 회복하고 충족시켜 보겠다는 시도를 함께 할 수 있겠느냐는 신랄한 지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율법주의적 시도는 전부 자기 자신의 가치 향상을 위한 자아 숭배적 사고에서 나온 아주 불경한 시도들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절대 자기의 위신과 자존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 추구하며 삽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요한5:44~47)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이게 죄인들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광을 다 버리고 하느님이 부르시는 불의의 자리, 불륜의 자리, 간음의 자리로 자신을 내 던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마지막 아담인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의 삶을 끝내 버리시고 새로운 아담의 삶을 여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신뢰와 믿음과 순종과 충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광은 모두 다 포기해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불의의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뢰를 예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힘을 의지했고, 세상에서의 힘과 가치를 숭앙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비하되고 낮아지는 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마귀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높여주지 않는 신은 아무 때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루가16:14-15)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여기서도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맘모나스’ ‘세상 신입니다. 그렇게 맘모나스, 을 좋아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싶어 하는 자아 숭배 교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상 숭배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와 유대주의에 의해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하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하느님의 미움을 받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사람 중에 높임을 받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는 모든 인류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사람 중에서 낮아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만 자신의 안위를 거는, 하느님의 아들의 삶을 살아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그 아들의 아버지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충성하고 순종하여 불의한 자가 되어, 불륜의 자리에서 죽었는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자비와 은혜로 살려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위대한 능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은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도움으로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차올려진 축구공과 같은 존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자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의 지혜가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작은 그림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열왕상3:16~28) 16 하루는 창녀 둘이 임금에게 나아가 그 앞에 섰다. 17 한 여자가 말하였다. “저의 임금님! 저와 이 여자는 한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에 이 여자도 집에 있었습니다. 18 그리고 제가 아이를 낳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이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집에는 저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집 안에는 저희 둘뿐이었습니다. 19 그런데 밤에 이 여자가 아들을 깔고 자는 바람에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20 그러자 이 여자는 그 밤중에 일어나, 당신 여종이 잠자는 사이에 곁에 있던 제 아들을 데려다 자기 품에 뉘어 놓고, 죽은 자기 아들을 제 품에 뉘어 놓았습니다. 21 제가 아침에 일어나 제 아들에게 젖을 먹이려다 보니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어서 그 아이를 자세히 보니 제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22 그러자 다른 여자가 천만에! 산 아이는 내 아들이고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야.” 하고 우겼다. 처음 여자도 아니야.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고, 산 아이가 내 아들이야.” 하고 우겼다. 그렇게 그들은 임금 앞에서 말다툼을 하였다. 23 그때에 임금이 말하였다. “한 사람은 살아 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고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다.’ 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다.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고 산 아이가 내 아들이다.’ 하는구나.” 24 그러면서 임금은 칼을 가져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시종들이 임금 앞에 칼을 내오자, 25 임금이 다시 말하였다.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26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는 제 아들에 대한 모성애가 솟구쳐 올라 임금에게 아뢰었다. “저의 임금님! 산 아기를 저 여자에게 주시고 제발 그 아기를 죽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너의 아이도 안 된다. , 나누시오!” 하고 말하였다. 27 그때에 임금이 이렇게 분부하였다. “산 아기를 죽이지 말고 처음 여자에게 내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기의 어머니다.” 28 임금이 이러한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을 온 이스라엘이 들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하느님의 지혜가 있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임금을 두려워하였다.

두 어미가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고 있지요? 두 사람 다 아이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솔로몬이 지혜를 발휘하여 진짜 어머니를 찾아 줍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그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반씩 나누어 가지라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평화의 왕인 솔로몬의 지혜가 자식을,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셨던 것을 기억하세요? 십자가지요? 그 둘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어미가 아무런 반응을 안했다면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을 판입니다. 가짜 어미는 그 아기를 자르라고 합니다. 금방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며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가짜 어미가 사실은 아이를 죽이는 자였음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의 마침은 사랑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너스레를 떱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감당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처음 자리, 어머니의 자궁의 자리, 핏덩이의 자리, 무력함의 자리, 어머니의 탯줄이 끊기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죽은 흙의 자리로 내던져 질 때, 율법은 가차 없이 우리를 죽이려 대듭니다. 그게 율법의 참소이며 고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주 자주 우리 성도를 죄의 자리, 불의의 자리로 몰아붙이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그토록 의지하던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정죄하는지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가능성과 행위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진짜 어미는 자기가 그 아기를 포기하겠으니 그 아기를 죽이지 말라고 선처를 구합니다. 어떠세요? 자식이 그가 온 원래의 자리, 핏덩이의 자리, 자궁의 자리, 즉 죽음의 자리로 내 몰리자 진짜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피조물의 원래의 자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들을 그들의 원래의 자리인 출산의 자리, 아니 그 이전의 자리, 자궁 속의 자리, 무력하고 불가능한 죽은 자의 자리, 어머니로부터의 생명선이 끊기면 무력한 고깃덩이일 수밖에 없는 그 자리로 자꾸 내 몰아 가십니다. 그 자리는 약한 자리이며 때로는 불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약함의 자리, 불가능의 자리에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와 영광이 임하여 오직 그 하느님의 능력만이 오롯하게 돋을새김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이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에 던져 넣으신 이유를 곡해 하시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우발적 범죄에 의해 당신의 계획과 뜻을 급히 바꾸시는 그런 나약한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과연 어떤 열매와 결과를 생산해 내는지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흙에 불과했던 당신의 자녀들이 어떠한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 그렇게 하늘의 왕자들이 되었는지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고자 당신의 백성들을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수시로 그들의 원래의 자리, 자궁의 자리, 죽음의 자리, 핏덩이의 자리, 세상과의 간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딱 두 종류로 갈라집니다. 마귀의 자식과 하느님의 자식입니다. 하느님의 편애에 의해 어떤 무리는 날 때부터 하느님의 자녀로 정해지게 되는 것이고, 어떤 무리는 그 편애에 의해 저주받을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야곱과 에사오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은 야곱을 편애하셨습니다.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느님의 마음에는 이사악에 대한 편애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불공평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공평하십니다. 함부로 하느님의 불공평에 대해 논하지 마세요. 하느님의 뜻이 곧 공평이며 하느님의 뜻이 곧 선이니까요. 그러한 하느님의 편애를 선택이라 하는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그렇게 하느님의 편애에서 제외된 마귀의 자식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인식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귀의 자식들이 자기들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게 될 때 그들이 어디로 숨는지 아십니까? 도덕과 윤리, 착한 행실, 율법 뒤로 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신 하느님이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처음자리로 내 몰리게 되면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부모가 하느님 아버지가 아님을 발각 당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죽음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혜로 성숙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감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자녀들은 율법에 의해 끊임없이 참소 당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절망하고, 자신들을 그렇게 연약한 자리로 내몰아버린, 자신들이 거짓으로 세워놓은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체를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율법과 도덕과 윤리와 공로와 행위 뒤로 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설적으로 착합니다. 착해 보입니다. 반드시 착해 보여야 합니다. 그게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셨는데 그들은 너무나 착했습니다.

 중요한 개념이니까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릴게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원래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죽은 흙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변함없는 죽은 흙의 삶을 삽니다. 구원을 얻은 후에도 도무지 산 자처럼 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수시로 죽은 흙의 삶, 자궁 속의 핏 덩이의 삶을 삽니다. 우리가 죽은 흙의 삶을 내어 놓았을 때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합니까? 고소를 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냐 네가 그러고도 교사냐?’ 율법은 우리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우리 아버지는 그 율법의 참소를 묵살해 버리십니다. 이미 당신의 아들 안에서 그 모든 참소를 다 해결해 버리셨기 때문합니다.‘ 어미가 아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곧 그 러고신의 죽음을 음미합니다. 그럼에도 진짜 아비는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솔로몬의 재판에 진짜 어미처럼 당신 러고신이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손해 정도가 아니라 러고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의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이 그렇게 우리 하느님에게 성취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번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목을 따고, 네 다리를 따고, 가운데를 갈라버린 그 번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은혜와 자비만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편애에서 제외된 자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행위와 율법을 의지합니다. 도무지 아버지의 은혜로 다가서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수없이 많이 쓰인 하느님의 ‘자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함입니다. 그 히브리어 라함은 자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뿌리가 같은 단어입니다. 자궁 속에서의 태아는 어머니의 생명선으로만 존재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궁 속의 핏덩이들이었고, 죽은 흙이었는데 하느님의 자궁에서 자비를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성도는 하느님의 자궁으로부터 자비로 잉태된 자들인 것이고 평생을 그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이며, 영원을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통하여 그 자궁 안에서의 핏 덩이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 위에 아버지의 자비가 덮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수시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크게 임한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 은혜의 자리, 자비의 자리를 예수의 십자가가 그대로 재현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충성하느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몰려, 죽은 흙이 되어 버리신 예수님. 우리의 간음의 현장, 우리의 불륜의 현장으로 내려오셔서 그 모든 불륜과 간음을 떠맡아 버리신 주님. 그렇게 우리 죽은 흙들의 원래 자리로 예수님이 내려가시자 거기에서 그 분의 아버지가 누구인가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수시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폭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 착하고 훌륭하게 살아내어 아버지 앞에서 떳떳한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성화가 아니라, 계속 죽은 흙의 삶을 토해내면서 우리의 불의를 폭로 당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하며 드러내는 것이 성도의 성화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항복과 충성과 순종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계속해서 우리의 불의한 청지기 됨을 우리 자신과 하느님 앞에서 낱낱이 폭로 당해야 합니다.

정리를 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리, 죽은 흙의 자리, 핏 덩이의 자리, 자궁의 자리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건 율법에 의해 정죄된 자리요, 고발된 자리였습니다. 율법은 그를 고발하며 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분을 죽여 버립니다. 그게 솔로몬의 재판에서 나온 가짜 엄마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미이신 하느님께서 그분을 자비와 은혜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친구인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가 그 그림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의한 청지기가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이고, 그의 지혜가 옳다 인정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 속에서 또 하나의 그림으로 예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다윗과 예수를 기필코 출산해 내어야 합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다말을 창녀로 만들어서 시아버지와의 불륜을 통해 약속의 자녀를 이어가십니다. 왜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냐는 말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느님의 자비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다말이 불의한 자리로 내려갑니다. 창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과 시 아버지에게 불의한 여인으로 고발을 당합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즉 율법에 의해 고발당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한 일이 밝혀졌을 때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담담하게 그 자리에서 충성을 합니다. 그렇게 주어진 불의에 충성한 다말이 약속의 자녀를 잉태하고 유다까지도 하느님의 라인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유다는 어떻습니까? 유다는 자신을 살리려하는 다말에게 율법이 되어 폭력을 휘두릅니다. 율법에 의해 화형을 언도 합니다. 이제 다말은 유다라는 율법에 맞아 죽을 판입니다. 그 때 자기희생의 증거물을 들이댑니다. 불의에 쓰였던 증거물들입니다. 그 결과 모두가 사는 것입니다. 그 불의의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자리로 스스로 내려가신 예수님의 핏 값인 것입니다. 그게 불의한 재물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참소하여 우리의 죄를 드러낼 때, 우리가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예수님의 핏 값, 불의한 재물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만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남편이신 하느님의 품을 떠나 세상과 간음하던, 세상과 불륜을 저지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만군의 주 성자 예수께서 죄인의 몸과 연합을 하심으로 스스로 간음의 자리, 불륜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간음과 불륜이 용서되고 소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이 간음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그렇게 친구가 된 성도의 삶 속에서 똑같이 순종의 삶, 충성의 삶, 자기를 비우고 손해 보는 삶, 모함을 당하는 삶, 해를 입는 삶, 그러한 율법에 의해 불의로 정죄되는 그런 연약한 삶을 격발해 내심으로 우리에게 친구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어구 안에 들어있는 풍성한 주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의 핏 값으로, 우리의 자기부인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남의 것에 충성하여 자기 것을 얻는, 불의의 재물에 충성하여 참된 것을 얻는 역설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이 세상의 힘과 가치와 모든 에너지를 친구를 사귀는 일에 올인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이 비유의 표피적 해석도 틀리지는 않는 것이라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과정을 다 빼먹고 서둘러 그런 도덕적 결론만을 취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 해석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잃은 양의 비유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자들로 표현이 되었던, 율법의 사람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빛의 아들들이라 생각하며 자신들의 위상만을 위해 삽니다. 그들보다는 세상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세리나 창녀, 죄인들에게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훨씬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세상의 아들들의 지혜가 빛의 아들들이라 자처하는 율법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비에 의해 구원을 얻은 자들이고, 자비에 의해 친구를 사귀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긴 비유의 이야기를 결론짓고 있는,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에 보면 거기에 자비라는 단어가 결론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루가16:19-31)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 역시 회개와 자비 문제를 하느님의 선택과 은혜의 측면에서 풀어낸 비유인 것입니다. 부자와 나자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살아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부활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사망의 부활로 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부활이 거지, 즉 세상이 판단한 불의에게 임합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은 자로, 승리자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았던 그러한 자는 사망의 부활로 지옥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자란, 이 세상에서 소유욕을 가진 채, 자기 가치 향상과 자아 숭배를 목적으로 하여 자기를 높이는 것에 집중하여 살다간 사람들 전부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된 자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을 구합니다. 자비는 우리 측에서 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지요? 당연히 그는 율법을 숭상하던 유대인입니다. 그런 종류의, 율법의 행위의 부자들은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가 왜 자비를 입은 자일 수가 없는지 아세요? 자비를 얻은 자들은 반드시 자궁의 자리로 내려가 죽은 흙인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각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부자의 행태를 보세요. 자기는 지금 지옥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자로를 종 부리듯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나자로를 시켜서 물을 좀 보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홀대하던 바로 그 식 입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자로를 자기 동생들에게 보내서 그들이 회개를 하여 지옥에 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아주 기특한 부탁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단박에 거절합니다.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 보내어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아무리 회개를 외쳐도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보았던 요한복음의 말씀이 정확하게 여기서 반복이 되고 있지요?

(요한5:45-47)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그렇다면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개가 헐은 데를 핥는데도 기력이 없어 그것을 쫓아내지 못했던 그 거지 나자로가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연한 순처럼,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으며, 불의를 뒤집어쓰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수많은 비유 중 유일하게 사람 이름이 나오는 비유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와 예수님의 친구 나자로의 이야기는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죽은 나자로가 살아났을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나요? 오히려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이려 했지요? 그건 예수님의 부활 후의 상황을 그대로 예시해 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었나요? 아니요. 제자들마저도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떠났습니다. 회개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인간 측에서 그 어떤 노력과 열심을 부려도 절대 인간 측에서 나올 수 없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아무리 자비를 구해도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부어지지 않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비유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이며 하느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게 루가복음 15장과 16장의 긴 다섯 개의 비유가 결론이 납니다. 결론은 역시 우리의 티끌 됨과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그리고 그 갭을 메우는 예수님의 십자가. 성경은 오직 그 복음만을 이야기 합니다. 착하게 잘 살자, 사회를 개혁하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 등의 선동이나, 복 받는 비결, 기도 응답의 비결, 그런 것들은 성경에 단 한 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회개,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구원,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택에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며, 하느님은 그러한 자비를 우리에게 부으시기 위해 거룩한 불륜의 자리로 스스로를 밀어 넣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발적 불륜의 자리이며, 자발적 불의의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잉태되었고 출산 되었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물질과 힘과 에너지를 자기의 가치 향상과 자랑과 과시를 위해서만 인색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발적 불륜에 의해 은혜와 자비로 탄생케 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은 그 분께 충성하는 일에 쓰여 져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에 의해 하늘의 장자들이 된 우리가 이 세상의 재물에도 충성하지 못한다면 어찌 하늘의 큰 것을 맡은 자가 되겠습니까? 친구를 사귀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힘과 에너지와 재화로 친구들을 살려 내십시오. 자신의 영광을 비우고 거룩한 불의의 자리를 자처하신 예수님의 자리로 내려가십시오.

부정한 우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불륜의 자리로 내려오신 우리 하느님, 우리는 그 복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부정한 자, 세상과 간음한자, 세상과 불륜을 저지른 자였음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은혜와 그 분의 사랑과 긍휼과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지요. 우리들의 삶이 지금 우리 뜻대로 되지 않으십니까? 일이 잘 안되세요? 그대로 수긍하시고 받아들이세요. 그 상황에 순종하시고 충성하십시오. 그 속에서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게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불의한 청지기에게 임한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때에는 우리의 삶과 시간이 허비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허랑방탕 허비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탕자의 비유나 청지기의 비유에 똑같이 허랑 방탕, 허비, 디아스코르피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지기나 둘째 아들이 결국에는 아버지의 잔치 집에 초청을 받았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건 거룩한 허비이며, 거룩한 허랑 방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한 우리의 삶에 허랑 방탕, 디아스코르피조의 삶은 없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선택 밖에 있는 이들에게나 해당이 되는 말인 것입니다. 그냥 그 상황에 순종하시면서 손해 보세요. 빼앗기세요. 거기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묻어 나오게 되고,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건 허비가 아니며, 불의도 아닙니다.

 아울러 지금 우리 자신을 볼 때 너무 더럽고 추악해서 치가 떨리는 지경입니까? 그 때 우리의 불의가 되시고, 우리의 불륜이 되셔서 우리를 건져내신 예수의 자비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우리를 덮고 있는 그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에 감격하세요. 그게 지혜입니다. 그 때 우리의 진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를 위해 창조가 된 자들이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는 자로 사는 것이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느라 하느님의 힘을 동원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게 저주받을 부자들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일갈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 즉 율법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과 지혜와 꾀와 계획을 다 내려놓으세요.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만 붙드셔야 합니다. 연약하다고 불의하다고 바보라고 오해받아도 좋습니다. 그 자리로 내려가세요.

 계획된 하느님의 불륜에 의해 잉태된 불의한 성도들, 아니 예수님처럼 불의에도 충성하게 된 하느님의 아들들, 하느님께서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볼 때 불의하고 연약한 자리로 내려가라고 할 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룩한 불의의 사람들, 그게 우리입니다. 우리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처럼 그 불의의 자리로 열심히 밀려 내려가십시다.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불륜이라는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성도의 불의라는 우리의 자인과 순종과 충성, 이해가 가세요? 그게 복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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