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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12.2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24 조회수1,80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12월 24일

제1독서 2사무 7,1-5.8ㄷ-12.14ㄱ.16

다윗 1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2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3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4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8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복음 루카 1,67-79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누구는 사랑의 어원이 ‘사량’,

 생각의 양에 있다고 하면서 사랑을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랑하면 계속 그 상대방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생각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한 번? 두 번? 아닙니다.

 계속 생각나야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하나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과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운 사람도

 계속 생각나지 않습니까? 물론 이때는

 ‘앉으나 서나 그놈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미운 사람의

 큰 차이는 보고 싶고, 보기 싫고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계속 보지 않으면

사랑의 마음도 사라집니다.

 옛날 짝사랑하던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되면서 사랑하던 생각도

사라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름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상대방이 원하는

것만을 해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계속 생각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내가 되어야 그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가

노래로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모든 육적, 영적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실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온전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갖추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더욱더

함께 해야 할 분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주님께서

오늘 밤 이 땅에 강생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향해 어떤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그분의 사랑을

보지 못해서 찬미보다는 불평과 원망의

노래를 드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우리는 일로써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간다.

(윈스턴 처칠)

보이는 것만 보지 않기.

남미 국경지대의 한 세관원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매일 어떤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타고 국경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늘 오토바이

뒤에 주머니를 달고 있는데 이 안에

밀수품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사를 해도 의심을 할 만한

물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할아버지를

세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절대로 처벌하지

않을 테니 이야기 좀 해 주세요.

할아버지 밀수하는 것 맞죠?”
할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이 세관원은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데,

도대체 그 밀수 품목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합니다.
“오토바이야.”
오토바이 뒤의 주머니만 봤지,

 타고 있는 오토바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일은 어떨까요?
보이는 것만 하느님의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에인카렘의 '즈카르야의 노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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