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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며
작성자한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24 조회수1,31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이 오늘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찬미예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성탄을 맞아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의 기쁨과 평화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며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과연 그분의 성탄이 저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습니다. 대림시기의 복음들은 계속해서 그분의 오심에 대해 믿음 안에서 기다릴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갖고자하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 하느님께 기도 드렸던 즈카르야는 주님의 천사가 기쁜 소식을 가져왔음에도 오히려 무엇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을지 표징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비천한 인간이 받기에는 너무나도 큰 선물이기에 과연 진짜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 선물이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어언 삼십 년이 넘어감에도, 그 가운데 하느님을 전적으로 따르고자하는 사제직을 준비하는 삶을 십 년 가까이 살아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습니다. 어쩌면 제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저만의 생각들이 가득 차 있기에 그분의 말씀이 기거할 자리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으로 말하고자하는 하느님은 하느님 자신이 아닌 제가 알고 있는 제가 전하고 싶은 저만의 하느님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며 비움의 은총을 청해봅니다.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안을 제 안의 작고 초라한 마구간을 준비해 봅니다. 매 주일 미사 안에서 사도신경을 바치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아닌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부분에서 우리가 고개를 숙이는 데에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수난하시고 죽으셨다는 것도 큰 이슈일지 모르겠지만 이에 앞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 커다란 자기 낮춤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입니다. 그분께서는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신 것일까요?

그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안기 위해 우리는 먼저 허리를 숙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립니다. 사랑은 같은 위치에 있고 싶어 합니다. 같은 눈높이에서 더 가까이 상대를 느끼고 나아가서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관계 안에서 느끼신 사랑의 풍요로움을 나누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죽음의 어둠이 드리웠습니다. 이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저 멀리서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기보다는 직접 이 곳으로 넘어오시어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모두의 죽음에 대한 값을 치르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수난과 죽음을 통해 모두 다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그런 그분의 구원의 역사 안에서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를 우리를 오늘밤 기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은 다 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다지도 사랑하셔서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창조도,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과 죽음도 그분의 부활도, 역사 안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모든 것도 전부 다 그분의 사랑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사랑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상대방이 내게 어떻게 해줬으면 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만으로도, 내 귓가를 울리는 그 사람의 음성만으로도, 내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의 가난함조차도 모든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며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 보여드릴 차례입니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한 번 더 바라봐 주시고, 한 번 더 불러주시고, 가난하기에 다 달라고 당신 뜻대로 해달라고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허름한 마구간 구유에서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표징이요 그분의 행동을 통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누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라도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어느 곳도 상관없다는 그분의 진심어린 고백입니다. 오늘 있는 그대로 부족하고 죄 많고 아픔 있는 그대로 그분을 위한 작고 불편한 구유 하나만 준비해둘 수 있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아멘 

 

 

유튜브를 통해서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uqRQDvemj1k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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