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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려깊은 신앙인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봅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31 조회수1,418 추천수2 반대(0) 신고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배려를 하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배려는 분명 아름다운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자정을 넘어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한 젊은 아주머니가 저 뒤를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방향이 같아서 그랬을 겁니다. 근데 보니 술이 좀 취했습니다.

 

요즘 날씨가 좀 춥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술이 된 상태에 날씨까지 추우니 몸이 덜덜 떨렸을 겁니다. 딱 보니 그랬습니다. 근데 그렇다고 제가 어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그냥 제 갈길만 가고 있었습니다.

 

술만 안 먹었으면 별 생각이 없었을 건데 중간에 갑자기 빨리 걸으면서 저를 바짝 가까이 다가올 때는 겁이 좀 났습니다. 겁이 나서 겁이 난 게 아니라, 가까이 올 때 알지 못하는 소리를 지르니 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꾸 신경이 쓰여 힐끔힐끔 뒤를 한 번씩 보면서 가야만 했습니다.

 

술 먹은 사람이라 괜히 말도 할 수 없는 사정이라 그랬습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해보면 제가 학창 시절에는 배우지 않았지만 계용묵의 구두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반대의 사정입니다. 어떤 아가씨가 앞에 가고 뒤에 남자가 가는 그런 사정입니다.

 

거기서는 남자가 불안해하는 여성을 위해 배려를 하려는 차원에서 여성 앞을 앞지를려고 하는데 여성은 그게 오히려 불안을 가중하는 꼴이 되는 그런 사정입니다. 아무튼 이런 비슷한 사정입니다.

 

수필에 나오는 남자처럼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는 게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그런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떨 때는 이 수필이 오랫동안 제 생각에 남고 또 늦은 밤에 집을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이런 경우가 있으면 어떨 경우는 상대방인 여자 분을 위해서 거리를 의도적으로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요즘 치안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밤늦은 시간에 여성 혼자 가는 경우에는 길거리에 사람이 드물고 한적할 때는 모르긴 몰라도 심리가 좀 불안할 것 같아서 그럴 경우도 어쩌다가 한 번씩은 있습니다.

 

남자인 저도 이런 경우를 겪어보니 이런 것도 상대를 배려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좀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 달 전에 신은근 바오로 신부님께서 저희 본당에 공적인 일로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본당에 다른 모임 때문에 신부님께서 예전에 저희 본당에 사목하실 때 결성이 된 모임이라 오셨습니다. 마침 신부님이 오시기 전에 주최하는 분이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 사이라 제가 맨뒤에 앉아 있어서 신부님께서 제 옆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신부님께 간단히 인사를 하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날이 좀 춥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 연세가 아주 많은 분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 뒤에 바로 히터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강의를 하는 도중에도 혹시라도 연세 있는 분들이 추우실지 몰라 온도를 조금씩 올렸습니다.

 

나중에 신부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쉬실 때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많이 추워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부님께서는 제가 추워서 히터 온도를 올리는 줄 아신 모양이었습니다. “아뇨 신부님, 다른 분들이 좀 추우실 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올 여름에 제가 아주 황당한 일을 하나 겪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사우나가 있습니다. 저녁에 사우나를 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사우나 입구를 조금 나가는데 뭔가 입구 마당에 떨어져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보니 순간 그게 여성 속옷처럼 보였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을 했습니다. 이걸 어째야 할지 말입니다.

 

왜 고민을 했냐하면요 목욕 바구니에 목욕 용품을 담고 사우나를 다니시는 분이 있는데 이걸 모르고 어떻게 담아가다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만약 제가 그 여자라면 그냥 여자만 지나다니는 길이면 모르는데 그 입구는 남녀 모두가 지나는 통로라서 나중에 자신이 그게 그곳에 떨어져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그 짧은 순간에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여자분을 위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배려를 하는 차원에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못하다간 봉변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카운트에 있는 이모님한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모님, 저쪽에 여자 속옷이 떨어져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이모님이 나오셔서 그걸 보고 주우셨습니다.

 

주우시면서 이모님도 이걸 칠칠맛게 흘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우시면서 순간 뭔가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이모님이 주워들어서 보는데 그건 여자 속옷이 아니고 여성용 팔토시였습니다. 순간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 줄 모릅니다.

 

순간 얼굴에서 열이 오르고 어떻게 해야 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제가 이모님한테 말씀드렸습니다. “저딴에는 좀 생각한다고 해서 말씀드렸는데 쓸데없이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 이모님이 나도 처음엔 여자 속옷처럼 봤다고 하시면서 머쓱해 하셨습니다.

 

그게 왜 여자 속옷처럼 보였느냐 하면요 일반 토시하고는 좀 달랐습니다. 그곳에 레이스가 달려있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여성용이라고 해도 레이스가 달린 토시는 그날 처음 봤습니다. 그 이모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 레이스 때문에 처음엔 속옷인 줄 알았습니다.

 

이모님은 이런 사항이 순간 너무나 웃음이 나는지 카운트로 가면서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그날 너무 황당하고 창피해서 그 사우나를 가지 않고 있습니다. 신부님과의 일화, 또 사우나에서 일어난 이 일화를 보면서 제가 생각한 게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남을 생각해서 배려를 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것입니다. 배려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자신은 상대를 위해서 배려를 한다고 생각하고 배려를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선 그 상대방이 어떤 마음으로 배려를 했는지에 대해 잘 모르면 원래 배려를 한 사람의 진심어린 배려의 마음을 잘 이해를 못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성당에서도 이런 경우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어제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상대방을 배려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 경우를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다시 문자를 통해 왜 제가 그랬는지를 혹시나 오해를 할까 봐 내용을 상세히 문자로 전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 일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이건 상대방이 저한테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제가 도와주는 입장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정말 신앙생활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땐 조금 힘듭니다. 제가 이런 일에 민감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과 인사를 잘하고 지내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께 많은 도움을 드리곤 했습니다. 어떤 경제적인 도움은 아닙니다. 근데 어느 날부터 저를 대하는 게 이상했습니다.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정말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2년 넘게 지나서 왜 그분이 그랬는지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연히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들어서 알았습니다. 전 그때 너무나도 황당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해서 제 시간과 물질적인 부분까지 들여가면서 그분께 뭔가 도움을 드렸는데 어느 날 정확한 사실도 모르고 저한테 곡해를 한 것입니다.

 

저는 이때 하나 크게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는 어떤 모임에서 이런 일을 지나가면서 툭 한번 던지는 말로 이야기를 한 모양입니다. 이 말 때문에 저를 평소에 잘 아는 분들은 베드로가 그럴 애는 아니다라고 하는 분도 있지만 모르는 분들은 그냥 그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자기 혼자 독불장군처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하느님과 자신 이렇게 일대일 신앙이지만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하기 때문에 공동체와도 함께 잘 어우려져야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말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내 배 아파 낳은 내 자식도 내 맘 같지 않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아무리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라도 자기 자식도 때론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없는 사정도 생기는데 단지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게 상대방이 어떻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태도는 한번 신앙인이라면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생각해서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상대방에게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상대방에게 이렇고 저렇고 해서 좀 섭섭하다고 서로 대화를 한다면 그 상대방이 그런 말을 듣고 자기가 생각했을 때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달리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 인정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이 생각이 좀 짧았다라고 한다던지 해서 미안하다거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표할 것입니다. 이것도 분명이 이런 상황일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아니면 들어보고 상대방이 자신의 뜻을 잘못 오해를 한다면 그건 오해라고 하면서 상대방이 오해를 하는 부분을 오해하지 않게끔 설명을 해 주게 된다면 상대방도 그로 인해 자신이 잘못 판단해 괜히 남을 곡해하는 일도 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마음에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입니다. 신앙공동체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떤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남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걸 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이런 글을 올리면서 제 자신을 한번 돌아봅니다. 저도 이 글에서처럼 남에 대해 저만의 사고에 갇혀서 남을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지나간 올 한 해를 되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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