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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와서 보아라 (요한1:29-4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04 조회수1,761 추천수0 반대(0) 신고

와서 보아라 (요한1:29-44)

(요한1:29-44)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43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빛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조차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 하더라는 탄식 끝에 그 빛을 알아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포효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는 어떻게 그 초라한 주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쓰인 용어에 대해 몇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대시대 때는 밀교(密敎) ‘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 밀교라는 것은 비밀스러운 종교입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도 일반사람들이 범부(凡夫)지견(知見)으로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밀교(密敎) ‘라 불렀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가르침은 현교)그러니까 밀교(密敎)의 특징은 범부(凡夫)들에게 아무렇게나 밝혀지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이라 는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 밀교무스테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대시대 때 그러한 비밀스러운 밀교(密敎) ‘ 의 의미로 통용되던 그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가 성경에도 여러번 나옵니다.

(마태13:10-11)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로마16:25-26) 25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26 이제는 모습을 드러낸 이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예언자들의 글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기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복음이 아무에게나 보여 지고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을 때 성경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initiation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감을 잡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복음의 비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initiation을 신학에서 회심’ ‘conversion'이 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 무스테리온을 알아볼 수 있게끔 그 비밀의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무스타고 그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예수님이 담고 있는 비밀을 그 가 알아보는 말을 하고,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무스타고그의 역할을 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종 사촌 형입니다. 아마도 어렸을 적부터 예수님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겨우 6개월 차이니까 예수님의 약한 모습, 지저분한 모습, 추한 모습도 모두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initiation을 통과하여 하늘의 비밀, 무스테리온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본문 32절과 3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으며 성령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모습을 정확하게 어린양과 연결을 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요한 만이 그 분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분명 구약에는 하느님의 성령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임할 것과 어린양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스테리온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읽고 공부했지만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곡해를 해서 정작 그 것들이 상징하는 예수그리스도로 연결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나자렛의 목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임하는 것과 어린양을 정확하게 연결을 시켰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요? 답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에 의해 선택 되어진 자였기 때문에 어느 날 하느님에 의해 그 눈이 뜨여지게 된 것입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알아보고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한 성령이 임하는 사건어린양에 대한 예언이 구약 성경에  문자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들을 다른 이들은 못 알아보았을까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모세의 기도로 먼저 가 보아야 합니다.

(민수11:26-29)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70 원로를 세우라고 명령하시고 그 70원로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70원로 중에 엘닷과 메닷이라는 자가 진중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역시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가 ‘못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건의를 합니다. 그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야훼께서 그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라는 그의 소원을 말하지요.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어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예언적 청원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모세 때부터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예언할 수 있는 자들이 될 것임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한 기도를 합니다.

(시편51:10-11) 10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 11 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 주소서.

 구약 때에도 성령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삶에 관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마다 왔다 갔다 하시면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어떤 교우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령 하느님께서 왔다 갔다 하셨다는 데 어느 때 오시고 어느 때 가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성령께서 정말 왔다 갔다 하시나요? 하느님은 無所不在하시며 편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하느님은 모든 만물을 그 품에 품고 계신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 모든 만물은 성령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성령 하느님이 오셨다 가셨다 하는 것처럼 기록했는가? 사울이나 다윗의 예를 보아도 그 분들이 죄를 짓고 하느님 앞에 패역 한 일을 했을 때는 여지없이 떠나버리시지요?

그 것은 성경을 읽는 독자인 교회들에게 하느님의 심경을 알려주기 위한 하느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죄에 대해 얼마나 분노 하시는지 그리고 그 분의 백성들의 불순종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는지를 성령이 떠나는 것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지요? 다윗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주의 성령이 자신을 떠난 것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드렸지요. 그렇다고 정말 하느님께서 그를 떠나셨었나요? 그 후로 다윗은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 후에도 다윗의 삶을 홀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은 다윗에게서 성령 하느님을 잃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 해서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우리 교회에게도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죄악에 어떻게 반응하시며 성령 하느님이 간섭하지 않으시고 이끌지 않으시는 영혼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지도 아울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이 떠날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시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그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이 떠날까봐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으면 되겠지요? 성령이 영원히 떠나지 않고 그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해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러 오신 분 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 가셨다 하는 모습을 그려놓 았던 것입니다. 차치 하고 그 다윗의 기도가 어떻게 예수님의 세례로 이어지는지 잘 보세요. 그 다윗의 기도는 요엘의 예언으로 이어지지요

(요엘3:1)1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하느님은 이렇게 요엘을 통해 이제 하느님의 성령이 그 분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서 절대 떠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의 혀 같은 성령이 하느님의 교회에 영원히 임하시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바로 오순절 다락방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다락 방 사건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성도가 方言을 하게 되고 입신을 하게 되는 그 런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 오순절 사건은 그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했던 것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모세의 예언적 청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기도와 요엘의 예언을 거쳐 신약의 교회에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새 창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교회가 생기기 전 교회를 품으시고 교회를 대표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 분은 교회를 내포하시고 대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에게 일어날 일을 먼저 그대로 사셨습니다. 豫表적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느님의 예언대로 교회가 성령을 받아 영원히 타락하지 않고 영원한 하느님의 자녀로 재 창조가 되는 그 장엄한 언약의 성취를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심으로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 분 이 교회를 품으시고 교회의 대표로 먼저 성령을 받으시는 모습이 바로 요르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 사건인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의 preview인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이신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그 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는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모세 오경서부터 시작되어 요르단강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十字架에서 어린양으로 죽는 방법으로 이루어 질 것임을 구약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성령이 비둘기 처럼 임하시는 사건과 어린양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하늘의 것을 볼 수가 없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그걸 안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은 구약 전체가 가리키던 메시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 분이 구약 전체에 흐르는 어린양의 실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29절을 보시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다‘’아이론이라는 동사가 현재 시제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죄의 심판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지금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이론이라는 동사는 치워 없애버리다, 값을 주고 사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미 2,000년 전에 마지막 죄의 심판의 사건이 뚫고 들어와 버린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구약의 어린양 사상은 이사악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이사악이 자기를 번제 할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통해 자신이 매달려 죽을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명령으로 죽어야 할 이사악을 대신해 어린양이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해서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는 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리야 산을 보면 그 곳에 참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미리 예고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유월절로 넘어가서 무죄한 어린양의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지고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통해 십자가를 지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또 설명이 되지요. 그런데 그 양은 그 달 10일에서 14일까지 그 집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양을 바로 잡아서 죽이지 않고 식구들과 함께 거하게 한 것은 그 어린양과 그 집 가족이 하나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어린양이 그 집 가족의 대표가 되어 죽는 것입니다. 그 것도 역시 우리 교회를 위해 교회의 대표가 되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 제도를 통해 수 없이 많은 어린양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역시 그 제물들도 모두 무죄 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그 어린양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린양이 여전히 무스테리온이었던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선민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사제도를 잘 행하면 그들은 구원받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 분 이 바로 구약에 수없이 예고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느님은 타락한 인간들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도록 그들을 하늘의 생명력과 단절시켜 버리셨습니다. 인간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초월과 완전히 단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절대 그 하늘의 비밀을 이해 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마태13:13-15)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르4:10-12)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함이니라 하시고

잘 보시면 주님께서 택함을 받은 자들 외에는 일부러 못 알아듣게 하시려고 비유로 말씀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의 비밀을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들 이외에는 절대 못 알아듣게 귀를 막아버리시고 눈을 막아버리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설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요.

(이사6:8-10)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9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10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보시면 하느님께서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혹시 복음을 알아 들을까봐 걱정을 하시는 듯한 느낌까지 받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죄인들에게 복음을 철저하게 막아 버리십니다. 그래서 전교를 미련한 것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무스테리 온을 외치는 것이 전교이기 때문에 성경이 그 것을 미련한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전1:18-24)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런데 그 미련한 이야기를 알아듣고 감격하며 나오는 무리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구약의 마지막 무스타고그가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또 다른 제자들이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들도 무스타고그가 됩니다.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도 역시 무스타고그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하늘의 비밀을 알았을까요? 그리고 그 세례자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쫓은 세례자요한의 제자들이나 베드로, 필립보, 나타나엘은 어떻게 바로 주님을 쫓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여러분은 어떻게 그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이렇게 감격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게 바로 ‘선택받은 자 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례자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이어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약에 예언되었던 바로 그 교회가 어떻게 시작될 것인 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려 드리겠습니다. 죄악으로 빛을 잃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이 그 빛을 알아보고 저 분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 된 어린양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이 정말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라는 것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 세례를 받으신 주님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영원히 하느님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 신약의 첫 번째 무스타고그이신 주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 둘씩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무스테리온이면서 무스타고그 이시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전혀 빛을 알아보는 자가 없었던 그 곳에서 주님을 알아 본 세례자 요한을 비롯하여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12사도가 주님께 선택을 받는 모형을 통해하느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부름을 받게 될 것인가를 미리 그의 책 서론에서 preview하 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로 부름을 받게 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세요.

(요한1: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여기서 보고호라오라는 단어입니다. 호라오라는 단어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내적 '깊은 인상이 남도록 주의하여 관찰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볼 때 그냥 본 것이 아니라 호라오한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온 정신과 시선이 그 비밀 에 집중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라오’ ‘집중하여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떻게 주님을 호라오할 수 있습니까?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잘 설명이 되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호라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배우는 일을 다른 모든 일 위에 얹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37-38)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8절에 쓰인 보시고’ ‘떼아오마이는 관심과 의도를 가지고 깊이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떼아오마이하실 뿐만 아니라 엠블레포하십니다. 본문 42절 보세요.

(요한1:42)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여기서 쓰인 보시고엠블레포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의 보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다양하지요? 엠블레포라는 단어는 신적인 통찰을 가지고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합 니다. 주님은 그러한 신적인 통찰로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여전히 추한 이 육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 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새겨 놓으신 새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그렇게 가꿔 가십니다. 그게 바로 엠블레 포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을 보시고 그의 이름을 '게파라고 지어 주십니다.’게파는 아람어로 반석‘’바위라는 뜻입니 다. 그 게파를 헬라어로 베드로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심으로 조약돌보다 못한 의지로 주님을 세 번 이나 부인했던 요한의 아들 시몬의 참 본질을 이미 아셨음을 보여주셨고 거기에서 그를 게파‘’반석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셈족의 문화권에서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소유권과 통치권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난 반드시 너에게 너의 참 본질을 찾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지요?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의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하느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느님의 소유이며 하느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세5:1-2) 1 아담의 족보는 이러하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던 날,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를 만드셨다. 2 그분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하셨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으시는 과정에서, 다른 말로 새 창조 속의 새 백성을 만드시면서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첫 창조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이름을 받고도 타락을 한 것과 비교하여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타락할 수 없고 영원히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하느님께 순복 하는 참 하느님의 백성, 참 이스라엘을 만들고 계심을 요한복음의 베드로의 이름 을 지으시는 장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복음의 일곱 날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지요? 그 장면은 요한묵시록 마지막 장으로 이어집니다.

(묵시22:3-4) 3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주신 당신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발휘 하셔서 그 분의 성품과 인격을 그 이름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반드시 만들어 내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의 아담의 이름을 지으시는 하느님 안에서, 요한복음의 베드로의 이름을 지으시는 예수님 속에서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와 요한복음의 새 창조가 어떻게 대조가 되고 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 성도들은 거듭난 후에도 자신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헛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우리 성도의 참 모습을 엉뚱 한 것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골방에 묻어둔 채로 마귀가 만들어 준 엉뚱한 옷을 입고 그게 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님을 호라오하게 된 사람들을 떼아오마이하시고 엠블레포하시면서 그들의 참 본질을 찾아주십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주님의 은혜로 백 점을 받아 놓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점짜리 인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꾸 사탄이 씌어 놓은 엉뚱한 가짜 자기를 바라보면서 5점도 감지덕지야라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백 점짜리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신분으로 변화되게 되었는가를 오관 속에서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참 실존을 깨닫게 해 드리고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끌어내는 것이 목자의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자에게 다른 것 바라지 마세요.

그리고 사도 요한은 본문 38절에서 주님을 쫓아 온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사도 요한이 거의 분명함)와 주님의 선문답 같은 대화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추구하며 주님 자신만을 찾는 자들임을 보여주십니다.

세례자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주님을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쫓아 온 두 제자에게 누구를 찾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많은 실수를 하고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함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던 것이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 무엇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닐 주님과 함께 묵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답으로 랍비 어디에 묵으십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 함께 묵으십니다

(요한1:39)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묵었다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요?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묵으시매그 말은 장막을 치다‘’성막을 치다 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 분을 쫓는 자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하늘의 비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로 안드레아가 자기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전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은 성도는 주님을 호 라오해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을, 진리만을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 풍성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오늘날 성도들이 쉽게 빠지게 될 오류에 대해서도 지적해 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에 엄청 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로데왕까지도 그를 흠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악하고 고집불통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가인들까지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도 사람인데 사람들의 칭찬과 자신의 명성을 왜 싫어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단호하게 그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주님께로 보냈습니다. 성도는 이 땅의 안내자와 지도자에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내자와 지도자를 통해 주님께로 가야 하는 것이지 목자를 여러분의 하느님으로 삼으셔서는 안 됩니다. 많은 분들 이 목자를 통해 하느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으면 자신들의 신앙까지 총체적으로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목자는 여러분을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안내자요 잠정적인 지도자일 뿐입니다. 절대 목자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목자들도 성도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면 안 됩니다. 목자는 성도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성도가 하느님을 더 잘 배우고 더 깊은 신앙의 성숙으로 들어 갈 수 있다면 언제든지 더 나은 곳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쫓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주님을 쫓게된 사람들은 그보다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루가3:1-2)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이 짧은 구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번 꼽아보세요.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 , 유대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 갈릴리의 분봉왕 헤로데,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 필리포스, 아빌레네의 분봉왕 리사니아스, 유대의 대 제사장 한나스와 카야파 등 당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람들은 몽땅 이 구절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세계를 이끌어 가던 세계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기 등장했습니까? 세상의 역사가들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았던 낙타 털옷을 입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세례요한의 때를 가리키는데 자리 매김 용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었을지 몰라도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이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초개처럼 버리고 주님을 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눈에는 바로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하느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은혜를 확인하고 그 은혜 앞에 감읍하여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 말씀을 호라오하고,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닌 주님을 추구하며, 하느님께서 세우신 안내자와 지도자를 통해 하느님께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경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서 은혜로 나를 완성시키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했을 때 인간적인 관점으로 누가 더 남자답고 멋집니까? 당연히 유다입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받은 돈까지 다 돌려주고 당당하게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고 목매달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유다는 그 후로 하느님께 버림을 받은 악인의 대명사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女從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쪼다 베드로는 자기의 불가능함과 추함과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었습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주님께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은 베드로는 그 은혜에 의해 자라나서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오직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그 은혜가 여러분을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직 그 은혜만을 의지하여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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