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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0. 1. 8. 복음묵상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 (마르 6,45-5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08 조회수1,31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 1. 8. 복음묵상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 (마르 6,45-52)

 

물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은 오병 이어의 기적과 연결이 되는 기적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이렇게 나옵니다.

 

(마르6:45) 45 그 뒤에 곧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 혼자서 군중을 돌려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즉시 제자들을 배를 태워 베싸이다로 보내십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여 리를 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역풍이 불었습니다. 그렇게 역풍이 부니까 제자들이 괴로워했다고 성경은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에이도) 그들에게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밤중에 등불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역풍에 표류하는 배를 예수님께서 보셨다고 하십니다. 십여리면 4km가 넘는 거리인데 한 밤중에 어떻게 보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황급히 바다로 내 모신 것입니다. 당시 한 부락의 인구가 평균 3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몇 개 부락이 동시에 모인 것으로 아주 혼잡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그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주던 그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시기 위해 바다로 내 몬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절대 너희들의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위의 폭풍 속에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떠나자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로 베싸이다로 떠나실 때 그들과 함께 떠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역풍을 만나자 주님은 그들에게로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주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는 데는 너희들의 힘이 보태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의 능력으로만, 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폭풍 위를 주님께서 밟으시는 것입니다. 그 풍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주던 손으로 열심히 노를 젓던 제자들은 그 때 주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배우게 된 것이지요.

 

하느님의 백성들이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수많은 내적 외적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고 병이 들고,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외풍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로 인한 역풍도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모난 성격, 불안, 우울, 근심, 염려, 욕심.. 계속해서 우리를 거스리는 외풍과 내 풍에 우리는 시달립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어두움과 고통의 세상에서 주님께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시편139:15-16) 15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16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이사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

 

(이사43:2)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 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지금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풍랑 속에 함께 계십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뭘 해요? 능력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주님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 제한 된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시고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으로 운영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에 스스로 매이십니다. 그것을 공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때때로 그 자연 법칙을 유보하십니다.

여호수아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기브온 민족하고 전쟁을 합니다. 이기고 있었는데 해가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느님의 분부를 따라 태양을 멈추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태양이 멈춥니다.

또 히즈키야 왕의 이야기에서도 하느님께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신 적이 여러 번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질량 불변의 법칙을 초월하신 것이고 물위를 걸으신 것은 만류인력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신 그 예수님께서 바로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분, 자연법칙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마르6:48) 48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젓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은 새벽 네시쯤이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냥 지나가려 하십니다. 성경이 왜 그런 표현을 쓸까요?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지나가신다는 표현을 쓰는 곳이 몇 군데 나옵니다. 그 표현은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거기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십자가에는 죄를 가까이 하실 수 없는 하느님의 거룩이 나타났습니다. 죄는 그렇게 저주하여 죽여 버리실 수밖에 없으신 하느님의 거룩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느님의 공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은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약속해 오신 하느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느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이 지나가신다는 표현은 바로 그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표현입니다.

 

(출애34:6) 6 야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하느님께서 모세 앞으로 지나가시면서 그 분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지나실 때는 그 하느님의 속성이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1열왕19:11) 11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왜 역풍이 부는 풍랑의 현장에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인생의 고난과 환난, 그리고 죄로 인한 고통은 정말 우리가 견디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하느님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내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측은히 여기시고 계시는 구나.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잘 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를 향한 징계의 채찍을 맞으며 우리는 하느님의 공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역풍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곳이 어디입니까?

 

(이사6:1-3) 1 우찌야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 다녔다. 3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우찌야 왕이 죽고 유대가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을 맞고 있을 때입니다.

 

(예제1:26-28) 26 머리 위 덮개 위에는 청옥 같은 것으로 된 옥좌같이 보이는 것이 있었다. 높이 옥좌 같은 것 위에는 사람 같은 모습이 보였다. 27 그 모습은 허리 위는 놋쇠 같아 안팎이 불처럼 환했고, 허리 아래는 사방으로 뻗는 불빛처럼 보였다. 28 사방으로 뻗는 그 불빛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마치 야훼의 영광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땅에 엎드리자, 말소리가 들려 왔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모조리 끌려가고 처참하게 황폐하게 된 상황에서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역풍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진화론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자생존,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 받는다이런 진화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생기고 안 되고 못 난 사람은 교회 안에서도 실패자로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우리는 창조를 진리로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창조론은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인 사람은 부자대로 예쁜 사람은 예쁜 대로 못난 사람은 못 난대로, 마른 사람은 마른대로 뚱뚱한 사람은 뚱뚱한 대로 하느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창조 된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자체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 줄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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