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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윗 시리즈 4편( 하느님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0 조회수1,244 추천수0 반대(0) 신고

 

골리앗은 몸만 큰 장수가 아니였습니다. 상대 진영의 기도 누를 수 있을 만큼 말솜씨도 가지고 있었고 블레셋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정보를 미리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원래 소문이라는 건 실제 사실보다는 눈덩이가 불어나는 것처럼 크게 부각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의 전략이나 자원등이 부족한 게 아니였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사람이 주는 공포감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골리앗이라는 장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이들의 마음을 위축시켜서 생각에서 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골리앗을 선봉으로 해서 아침 저녁으로 40일 동안 이스라엘에게 화를 돋구었습니다. 골리앗과 대결한 위인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 사울이 있었습니다. 또한 요나단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그들을 지켜주고 계신다는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블레셋과 대치한 이스라엘은 골리앗이 두렵다는 공포감이 주는 생각에 두려웠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이라는 영웅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은 타고난 영웅도 아니였습니다.

 

그런 기백은 오로지 여호와 하느님을 믿는 절대적인 믿음 하나로만 무장된 믿음이 그 중심에는 있었습니다. 실제 전술과 전략 측면에서만 보면 블레셋과 객관적으로 비교해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종적으로 블레셋보다 우위을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가진 커다란 포부와 생각의 크기였습니다. 사무엘상 1745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들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기백이 하늘을 찌르는 듯합니다. 이런 용기로 골리앗과 맞서려고 했으니 당연히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강한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건 모든 게 자신이 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을 때는 누구나가 믿음이 좋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시련이나 힘든 일이 자신앞에 주어졌을 때도 그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다면 그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고 흔히들 말을 많이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사명감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냈기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다윗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 배울 점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가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이상의 절대적인 믿음이 수반되었습니다. 이것도 단순히 그냥 믿는다고 하는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게 아닐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각의 크기가 남달랐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면서도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보는 시야가 좁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자 하는 그 면만 보기 때문에 단순히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야가 넓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을 보는 사람이 시야가 넓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크기를 키우는 것도 이와 흡사하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도 잘 모릅니다만 아마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앙에 대한 지식이 많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지식은 성경에 대한 지식도 포함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2000년간 이어져오는 천주교의 역사 내에서 교부와 성인들의 주옥 같은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지금 자신의 영혼을 진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는 인터넷으로 만나 지금까지 교제를 해 온 교우님을 만났습니다.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서로 살면서 인터넷으로 영적인 교류를 근 5년 정도 지속적으로 하며 지냈습니다.

 

어제 처음으로 마산에서 만나뵈었습니다. 거제도에 여행을 오셨다고 하시면서 올라가는 길에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만나뵈었습니다. 이 분을 만나면서 하나 배운 게 있었습니다. 평신도이지만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성경 지식만을 가진 게 아니였습니다. 이력만 보면 왠만한 신학자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이분이 가진 성경 지식을 부러워한 게 아니였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에 비례해서 이분이 가진 겸손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보면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적으로 좀 우쭐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분에게서는 그런 걸 전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이분이 남긴 말씀 중에서 아주 인상적인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알량한 성경 지식이 오히려 교만을 키울 수가 있다는 걸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실 이 분이 자신이 얼마나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했는지를 이분 교구에서 아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다고 하십니다. 어제 처음으로 저에게 이분이 개인적으로 평신도이면서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사연도 들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한때는 자신도 지식욕에 상당히 교만했던 적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근데 어느 날 그게 얼마나 큰 교만이었는지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게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성경을 배우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면 그건 성경을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알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성경에 해박한 사람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냥 성경 지식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는 성경 지식과 더불어 그 의미 속에 숨은 뜻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분은 외국에서 공부를 하시면서는 단순히 성경 지식만 아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이런 지식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된 후 한국에 와서는 전혀 다른 각도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 속에 있는 글자는 죽은 글자라고 합니다. 이때 이 죽은 글자가 살아서 움직이는 글자로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냥 죽은 글자로만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볼 때만이 그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본다면 그냥 하나의 도덕 교과서와 같은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제 많은 걸 그분을 통해 배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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