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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이 주신 금 같은 시간 어떻게 선용을 해야 할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2 조회수1,483 추천수0 반대(0) 신고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욕망 중에서 명예욕이 있습니다. 명예욕은 범인들의 세상에서는 감투라고도 흔히들 말을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감투는 한 개인에게는 명예욕이 될 겁니다. 요즘은 흔히들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예전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기대수명이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에는 의학의 발전도 한몫을 한 건 사실입니다.

 

백년은 한 세기입니다. 어제 올린 글에서도 표현을 했습니다만 시간은 정말 유수같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탄생에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시간은 붙들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시간만큼 공평한 것도 드물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집니다. 20년 전에 아는 스님으로부터 들었던 불교 야사 중에 하나 기억나는 야사가 있습니다. 전체 내용은 잊어버렸습니다만 핵심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스님의 특기 중에 하나가 불교 야사를 많이 아십니다. 이걸 알아도 말로 잘 표현을 하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이 사람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사람은 자기가 태어날 때 고유한 시간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불교 용어가 있는데 제가 오래되어 그냥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원래는 고정된 시간을 준다고 합니다. 가령 염라대왕이 너는 태어나서 80년만 세상에 살다가 와라고 하고 시간을 주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은 80년이 될 겁니다.

 

원칙적으로 하면 80년을 살면 염라대왕이 저승사자를 이용해서 데리러 온다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에는 하나의 예외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승사자가 더 빨리 오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저승사자가 더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이야기를 할 때 제가 스님께 그 이유를 여쭤봤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스님.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원래 세상에서도 시간이라는 것은 금이다라고 하는 격언이 있듯이 시간은 그냥 무상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은 돈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80년이라는 시간을 세상에 허락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세상을 살 때 너무나도 시간을 가치 있게 잘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이 시간을 준 다른 사람 중에서 시간을 아무렇게나 소비한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가치가 없기에 그 시간을 도로 빼앗아 시간을 잘 관리하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받은 시간은 다르게 표현을 하자면 덤으로 얻는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명예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시간을 제가 이야기하니 조금 의아해하실 겁니다. 시간과 명예가 무슨 상관이 있고 또 수명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일까요?

 

이건 과학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하나의 불교 야사이면서 설화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만 이해를 하셔야 될 겁니다. 인간이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 욕망은 보통 생존과 직결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생존과 관련되지 않은 욕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명예욕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명예욕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피비린내나 암흑의 역사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가족간 피를 흘리는 그런 역사도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명예라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명예는 명예를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그 명예를 가졌을 때 빛이 나는 것입니다. 옛날 개신교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30년 전 표현입니다. 요즘은 성경 표현도 다양하게 번역을 합니다만 도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도야지는 돼지를 지칭합니다. 굳이 이 말의 의미를 말씀드리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겁니다.

 

명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인류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긴 위인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말년을 명예롭게 인생을 장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명예가 후대에도 이름을 남겨서 정말 귀감이 되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에게도 맞지 않은 명예를 탐해 그로인해 나중에 말년을 오명의 삶으로 마감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자리가 있다면 반드시 그 자리에는 그 자리에 맞는 적임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습니다. 옷도 아무리 고급 옷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잘 매치가 되어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차라리 화려한 옷이 오히려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감투도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옷을 입기 위해서 어떤 경우는 자의적으로 입을 수도 있지만 타의에 의해 입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이 신분을 만들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의 종교를 보더라도 로만 칼라를 하신 분을 보면 우리는 그분이 신부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인 국민정서상 종교를 불문하고 성직자라면 타 종교라도 일단 성직자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존중을 해 주는 건 보통 일반적입니다. 요즘은 일부 타락한 개신교 목사들 때문에 개신교의 위상이 완전히 땅에 추락하는 경우를 보기도 합니다. 바로 어떤 옷을 잘못 입었을 때 그 옷은 자신의 인생에 불명예로 남게 됩니다.

 

우리 사람은 그런 불명예를 가져올 수 있는 옷을 입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종교를 불문하고 여기에 마치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스님의 세상 친구 중에 목사 친구도 있다고 합니다. 목사 친구랑 그래도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종교의 교리는 다르지만 인간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스님이나 목사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 실제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영혼이 불쌍하다고 합니다. 남들이 봤을 땐 절대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라도 종교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도 그런 자리에 한번 앉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니 때론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잠시 돌아가겠습니다.

 

염라대왕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처음에 염라대왕이 시간을 주었을 때 시간이라는 옷을 입혀 세상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 옷은 그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라고 해서 염라대왕이 특별히 제작한 옷이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옷이라고 합니다.

 

근데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남이 입고 있는 옷이 더 화려해 보이는 것처럼 느껴 그 옷을 자기도 입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긴다고 합니다. 근데 이 욕망이 욕망으로만 그친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남이 입고 있는 옷을 벗겨서 자기가 그걸 입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입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세상적으로 순리대로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어떻게 하게 될 겁니다. 이런 과정에서 불법이 자행될 겁니다.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예를 잘 보면은 염라대왕이 처음에 자기에게 준 옷을 자기 스스로 입지를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옷을 엉뚱한 곳에 소비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형국입니다.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이라는 속물 때문에 남의 시간을 탈취한 죄도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시간을 탈취한 시간만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까먹는 그런 결과가 됩니다.

 

염라대왕이 이 사람에게 문책을 한 것은 이것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큰 문책을 한 내용이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옷을 이 옷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인데 그만큼 아주 특별한 옷인데 그 옷의 가치를 모르고 살은 죄에 대해 엄중 질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야사가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가 또 잘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워낙 스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이해를 하긴 하지만 잘 표현을 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기는 합니다. 저도 처음에 이런 이야기를 잘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많이 듣다보니 어느 순간 조금 이해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불교와 개신교 상황을 통해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리라고 봅니다. 어쩌면 야사지만 정말 생각해볼 만한 의미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보좌 신부님으로부터 강론을 듣고 알은 사실입니다. 시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라고 하셨습니다. 카이로스 시간과 크로노스 시간이라고 합니다. 크로노스 시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누구나가 아는 시간 그런 개념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근데 카이로스 시간은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이 시간에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소유의 개념으로 본다면 크로노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가지는 시간입니다. 서두에 80년이라는 시간을 말한다면 어떤 두 사람에게 80년이라는 시간을 주었다면 만약 여기서는 하느님으로 말씀하겠습니다.

 

만약 어떤 두 사람이 똑같이 8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하느님 앞에 갔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시간을 잘 선용하고 오라고 미션을 주셨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물리적인 시간(크로노스 시간)을 보낸 면에서는 똑같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크로노스 시간을 주신 것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의미가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크로노스 시간에 어떤 의미가 부여된 바로 카이로스 시간을 어떻게 보낸 지에 대해 더 의미를 두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의미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또한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잘 헤아려서 시간을 보내야만이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잘 선용하고 나중에 하느님께 가게 될 것입니다. 1년을 살고도 천년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년을 살고도 일년도 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1년을 살아도 자기 옷을 입고 살아야지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보내는 시간은 그냥 흘려보내는 의미 없는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만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제가 이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신앙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보내는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뜻에서 좀 깊은 주제로 글을 올렸습니다.

 

사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건 숨겨 놓았습니다. 그게 무엇일지 한번 생각해보시면 유익한 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뭘지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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