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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풍병자의 치유 (마르2,1-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6 조회수1,88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1.17.

 

중풍병자의 치유 (마르2,1-12)

 

성경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병자 중에는 중풍병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 대하여는 다른 병을 고치시는 것에 비하여 제법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마르코복음 21절에서 12에 나오는 사건을 들 수 있겠다. 이 사건은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 전부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에 중풍병자를 치료하고자 네 사람이 병자를 침상에 들고서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그 지붕을 뜯고 위에서 내려서 고침을 받은 사건이다.

 

이 치유의 사건은 영적으로 중풍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보이는 사건은 표현이고 그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다.

육신으로 중풍을 본다면, 뇌 질환이다. 뇌의 혈관에 이상이 생기거나 터져서 뇌의 기능 일부를 수행하지 못함으로 몸의 마비가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된 것이 바로 중풍인 것이고, 중풍병자라는 것은 머리의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가파르나움의 중풍병자 역시 그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혼자 걸을 수 없어서 네 사람이 들것에 뉘여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말씀이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셨다. 이 말씀을 읽으며 그 사람이 많은 죄를 지어서 그 벌로 중풍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 말씀이 아니다.

죄의 원어는 하르마티아(Hamartia: 헬라어)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것은 화살이나 창은 과녁에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과녁을 벗어나 버린 상태를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자리를 이탈한 상태를 죄라고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너는 누구냐?’하는 문제다. 그것은 너에게 주어진 자리와 정체성이 있는데 그 자리에 네가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아담이 범죄 하여 숨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아담에게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그것도 이미 대화할 수 있게 아담을 찾아 와서 물으신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숨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인 인간이라는 자리를 벗어나서 뱀에게 꾀여 하느님처럼 되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마치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존재에게 그 존재가 있어야 할 자리, 즉 정체성을 정하는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세상에 들어온 이유를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 부모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세계 안에서는 자식이나 부모나 다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다.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서 죄에 빠졌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창조의 목적이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그것이 바로 중풍병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중풍이 걸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사람에게 표현되지 않는 상황을 설명하는 질병이고, 그것을 치유한다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수용하고 표현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므로 죄가 용서하여 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신 자리를 떠나 있었던 것에서 돌이켜서 하느님께서 매겨 놓으신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과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은 같은 사건인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모든 인생은 다 중풍병자이다. 즉 하느님께서 주신 목적을 수행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떠나 있는 모든 인생은 다 죄인이고, 하느님 앞에서 중풍병자인 것이다그러므로 중풍병자의 육신이 회복이 되듯이 사람들도 그 삶이 하느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도록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신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더 쉬운 표현이라고 하셨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하느님의 뜻이 자기의 삶으로 표현하는 하느님이 주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영적인 중풍상태에 있는가? 이 병자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만나지 못했다. 마치 중풍병자의 혈관이 막힌 것과 같이 말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형식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을 행동 양식으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병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받아서 그것을 잘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길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율법을 그렇게 지키는 자신들을 자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종교적인 공로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야 즐거워하는 하느님이시라면 그건 엘리트들의 하느님일 뿐 만민을 위한 구세주는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처럼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받으려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그러한 상황이 바로 중풍병자와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영적인 중풍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읽는 그 가치관이 바로 바리새인인 것이다.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한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신념과 의지로서 따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다 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그맨이 개 흉내를 내는 것 보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들은 그냥 개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표현이 어떤 행위 규범과 같이 표현되었더라도, 성경이 말하고 있는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말씀이 자기의 삶이 되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을 생명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행위 규범으로 보면서 지켜 행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기고 가르치며 배우고 노력하는 그 모든 가치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가치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어떤 행동을 함으로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여긴다. 게다가 그것을 교회가 가르치고 있다. 그런 가치관은 예수님을 만나게 할 수 없고 오히려 바리새인과 같이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행위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기준에 의거하여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행위로서 유대인들을 많이 화나게 한 분이다. 유대인들이 정한 행위 규범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못 박히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행위로 공로로 하느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만나 주시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영적인 중풍병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병자가 치유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이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생각이 정상적으로 몸으로 표현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은 지붕을 뜯어내고 그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한 것이다. 지붕은 하늘을 가리는 것이다. 지붕이 하늘을 가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게 하듯, 바리새인들과 같이 행함으로 하느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생각이 하느님의 뜻을 가리는 것이기에, 그것을 뜯어내고 병자를 예수님과 만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지붕을 뜯어내었을 때, 이미 그 병자의 병은 치유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지붕을 뜯어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것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가치관에 가려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채 계속 하느님의 뜻이 내 삶이 되지 못하는 중풍병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서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이미 중풍을 이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낮은 죄인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심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중풍병자가 만나려 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원래의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를 수용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벌거벗겨졌고, 손과 발에 못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고, 그 신분은 죄인인 자리였다.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 행동으로 전달이 되듯 십자가가 나에게 나의 자리로 인정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께서 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그 사람에게 중풍병자와는 다르게 잘 전달이 되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이다.

 

중풍은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들지 못하는 병이다. 영적으로 본다면 하느님의 뜻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그것과 같다. 그리고 그 상태를 성경은 죄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뜻과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서 마치 머리의 생각을 몸이 받들듯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죄가 용서 받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보이심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 서로의 죄를 용서하여 주는 것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주님의기도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가파르나움의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심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9:4)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태9:6)고 하셨다.

이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풍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그 사람의 생각과 삶에 정상적으로 반영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모습이 연약하고 때로 세상적인 규범에 대하여 죄도 범하고 종교적인 규례도 지키지 못하는 상태 그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모습이 초라하고 볼품없고 연약할지라도 하느님께서 그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고치려 하여 욕망도 제어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원래 그렇다. 그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연약하다는 것, 그 연약함을 가진 상태로 하느님이 지으셨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때문에 사람이 서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만 없어진다면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가 바로 그런 연약함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에 온갖 기준과 법과 규례를 어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은 그럴 수 없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영적인 중풍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을 볼 때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니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함을 보여 주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죄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들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늘 판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생각이 악() 생각이라고 하셨다. 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악한 생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판단하고 심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에서 죄를 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 그렇게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도 늘 그런 심판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심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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