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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르 2,23-2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21 조회수1,002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121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르 2,23-28)

   

주님께서는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신다. (1사무16,1-13)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화답송 시편 89(88),20.21-22.27-28(21)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나도 그를 맏아들로, 세상의 임금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리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옛일을 언급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밝히신다. (마르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사무16,1-13)


그 무렵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았다."  (1)

 

사무엘 상권 16장은 사울의 이야기가 일단락을 맺고, 다윗이 역사 가운데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을 다룬다.

하느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시고, 일찌기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다윗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식의 망령된 제사를 드렸던(1사무15,31) 인본주의적인 임금 사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서 당신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삼으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1사무13,14),

또 다시 주님의 아말렉족 전멸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사울을 향해서 하느님께서 '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에게 왕국을 찢어줄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1사무15,28).

여기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임금보다 훌륭한 이웃'은 바로 사무엘서 상권 16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다윗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윗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무엘서 상권 16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13절에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임금으로 기름부음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14~23절에서는 주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이 내린 사울을 시중드는 다윗의 모습이 소개된다.

한편 '나는 이미 ~밀어냈다'에서 '내가 ~했거늘'에 해당하는 '와아니'(waani)접속사 '와우'(wau)와 1인칭 주격 대명사 '아니'(ani)가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접속사 '와우'(wau)는 사무엘이 사울의 폐위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아야 될 이유를 나타내는 문장을 이끌고 있다.

또한 주어의 인칭이 동사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주어를 대명사로 다시 또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주시는 주체인 하느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하느님 자신을 나타내는 '아니'(ani)는 '너는' 으로 번역되어 사무엘을 뜻하는 '앗타'(atha)라는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과 사무엘의 태도를 대비시켜, '나는' 사울을 버렸는데, '너는' 왜 슬퍼하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메아쓰티우'(measthiu; have rejected him)'거절하다', '밀어내다'뜻하는 '마아쓰'(maas)의 능동태 미완료로서 남성 3인칭 접미어를 취해서 '내가 그를 버렸다(밀어냈다)' 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지만(1사무15,23.26),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느님을 임금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했던'(1사무8,7; 10,19)결과이며, 사울 임금을 따라서 주님의 명령을 어겼던 결과였다(1사무15,9).

이러한 연관성을 살펴볼 때, 임금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대표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했던 임금이 하느님께 배척받았으므로 더 이상 임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을 선택해 주셔야먄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임금의 권한과 권력이 철두철미하게 하느님의 지배권과 주도권 아래 속해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사울의 폐위에 대해 슬퍼하는 사무엘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채워 가지고'에 해당하는 '말레'(malle)'넘치다', '풍부하다', '충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레'(malle)의 강조형 명령법이다. 이 동사는 공간적 '가득함'(탈출10,6)이나 시간의 '만료'(창세25,25)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리고 '말레' 동사는 일반적으로 능동형이나 수동형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말한 것의 이행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채우다'는 직접적인 의미 말고도 '온전히 이행하다', '힘을 다하다'라는 뜻도 갖는다(여호14,8; 1열왕9,24).

 

여기서도 이 동사는 사무엘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뿔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는  뜻으로도 쓰였지만, 더 나아가 이제 애도의 시간을 끝내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느님의 지시에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뿔에'에 해당하는 '카르네카'(qarneka; your horn)''을 의미하는 명사 '카렌'(qaren)에 사무엘을 지시하는 남성 2인칭 단수 접미어 '카'(ka)가 결합한 형태로 '너의 뿔'로 직역이 된다.

 

여기의 '뿔'은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사용된 '기름병'(1사무10,1)과 비교된다.

이 뿔은 다윗의 기름부음을 다룬 사무엘서 상권 16장 ~13절의 처음과 마지막 절에서 반복되어 강조됨으로써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것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주님 앞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사울이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기름병'으로 받았지만,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질 다윗은 '뿔'로 기름부음받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뿔'사무엘서 상권 2장 1절과 10절의  한나의 기도 속에도 이미 나타나 있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여기 등장하는 '뿔'도, 한나를 미천한 여인에서 기쁨과 감사의 여인으로 높이신 하느님의 능력이 새롭게 선출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에게도 부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름'에 해당하는 '셰멘'(shemen; oil)은 일반적으로 '올리브 기름'을 뜻한다.

이 기름은 요리할 때(1열왕17,12), 희생 제물과 예배와 관련하여(레위2,15-16; 에제45,14), 화장품이나 향로(아모6,6; 시편104,15), 등잔(탈출25,6; 레위24,2)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처럼 임금이나 사제나 예언자들을 세우는 데 사용될 때에는(레위8,12; 1열왕1,39) 하느님의 풍성한 축복과 능력이 내려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사울과 다윗의 기름부음 받는 장면을 비교해 볼 때, 사울의 장면에서는 다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만이 나오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뿔'에 기름을 채우라는 명령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명령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를 주도적으로 세우시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27~28)

마르코 복음 2장 27절'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라는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이나 루카 복음 6장 1~5절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가 전승된 내용들 중에 간과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단죄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호스테'(hoste; therefore)도 병행구절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단어인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을 받기보다는 안식일에 대한 전체의 논쟁을 결론짓기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단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와 안식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권한 있으시고(10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혼인 잔치 집의 신랑(19절)이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28절)까지 되시는 분으로서 나온다.

즉 이 네 편의 논쟁은 모두 예수님의 신적(神的)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도전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명쾌한 답변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10,17.22.28절).

그런데 그 답변들을 살펴보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하나의 공통된 관점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답변자이시고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예수님은 바로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10절)이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17절)이시며, '새 포도주, 즉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을 가져오신 분'(22절)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28절)이시라는 것이다.

 

 

(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1월16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노력을 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래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적으로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즉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간은 칠일로 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을 위해 허락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엿새 동안 이런 저런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날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가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주님께 대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 하여야 한다. 그렇게 깨끗하게 된다면 제단으로 나아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즉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즉 법률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즉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가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징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판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일을 잘 사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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