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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1.2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21 조회수1,484 추천수6 반대(0) 신고

 


2020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1사무 16,1-13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복음 마르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1970년대,

1980년대가 더 좋았다며

현재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점이 지금보다

더 좋았냐고 물으면 “정이 넘쳤다.”

라는 대답입니다. 그 누구도

당시의 가난, 엄청난 노동 강도를

두고서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문명의 발달이

지금보다 떨어진 것을 두고도

좋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딱 하나,

사람 간의 ‘정’이 넘치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좋았음을 말합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좋을까요? 자동차를

운전하시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차를 바꿀 때 더 높은

사양으로는 바꿀 수 있어도,

낮은 사양으로는 차를 바꾸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까요?
돌아가서는 안 될 만큼

물질문명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때가 좋았어.”라는

푸념을 하지 않을까요? 지금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되면

될 것입니다. 그 누구는 불가능

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을 나 자신부터 나눠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받고

싶은 ‘정’을 나부터 시작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을

나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때가 좋았어.”라는 말보다는

 “지금이 좋아.”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이 ‘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 아닌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사라져서 계속 과거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삭을 뜯고 있었지요.

이 모습에 바리사이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즉,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고 있는 것이

왜 잘못일까요?

잘못이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은 밀 이삭 뜯는 것을

추수하는 ‘일’로 여긴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확대해석해서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맙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린 마음과 넓은 마음으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펼쳐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이 좋아”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세상이 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이처럼 잘 사는 것에 전념하면

미래는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다.

(소크라테스)

사랑의 실천은 공감에서...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는

요리를 사랑하던 할머니가

관절염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제 요리를 못하겠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래서 자신이 다니고 있었던

디자인 회사에 건의를 했지요.

즉, 연세 드신 분은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것이 힘드니 새로운 문손잡이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당했습니다.
당시 26세였던 무어는 자기 스스로

 디자인을 하기 위해, 관절염을 앓는

80살의 노인으로 분장합니다.

머리에는 흰 가발을, 얼굴에는

라텍스로 만든 주름을, 눈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뿌연 안경을,

귀에는 잘 안들리게 솜을, 팔목과

발목에는 관절을 움직이기 힘들게

부목을, 허리에는 구부정해지게 붕대를,

다리에는 걷기 어렵게 철제 보조기를

 하고서 자그마치 3년간을 노인으로

살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공감하기 위해서 스스로 할머니가

되는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연세 많으신 분을 더욱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 맞는 멋진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바로 이런 공감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공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셨음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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