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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주일] 하늘나라 선포 (마태 4,12-2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26 조회수1,05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월 26

[연중 제3주일하늘나라 선포 (마태 4,12-23)

   

이사야 예언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며 암흑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칠 것이라고 한다(이사8,23ㄷ―9,3)

23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말재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밝힌다. (1코린 1,10-13.17)

10 형제 여러분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11 나의 형제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다(마태 4,12-23)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바다로 가는 길요르단 건너편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이사8,23ㄷ-9,3)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8,23ㄷ)

 

이사야서 7장과 8장에서는 남부 유다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위급한 상황에서 주어진 예언의 말씀이 다루어졌다.

말하자면 당면한 난관을 해결하는 길이 하느님을 의지하는 데 있음을 밝히며 동시에 아시리아를 의지하는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패퇴하여 남부 유다는 보존될 것이 예언되었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8장 23절 이하부터 9장 7절까지는 이러한 암울한 전쟁과 압제가 종식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춰질 것이리라는 희망찬 내용이 예언된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을 열고 있는 본절은 원문에는 8장 23절ㄷ로 되어 있는데, 불가타(Vulgata) 라틴어 역본에서는 8장 23절부터 9장이 시작되어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이것을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암울한 내용이 예언되었던 이사야서 8장 19~22절의 내용과 달리 8장 23절부터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장면에서 전환해서 하느님께서 은총의 큰 빛을 다시 비추실 것을 선언한다.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는 이사야서 9장 6절까지 계속되어 한 단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희망의 근거는 장차 육화하시어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오실 천주 성자 메시아의 오심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서 8장 23절ㄷ과 9장 1절은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련지어 마태오 복음사가가 마태오 복음 4장 14~16절에서 인용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가리켜 이사야 예언자가 700여년 전에 선포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천대를 당하고 암흑의 땅에 살던 즈불룬과 납탈리 땅, 이민족들의 지역인 갈릴래아(마태4,15)에 큰 빛이 비추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역에 가장 먼저 가져오신 복음과 치유와 구원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사야서 8장 23절과 9장 1절의 예언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의 남부 유다의 귀환 공동체에서 성취되었다고 볼수 있으며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8장 23절ㄷ에서 원문에는 '주님'에 해당하는 고유 명사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대를 받았으나'에 해당하는 원문은 '천대를 받게 하셨으나'인데, 문맥상 여기에 해당하는 동사 '헤칼'(heqal)의 주어는 남성 3인칭 단수로서 주 하느님 이신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천대를 당하게 하실 수도 있고 영화롭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은 주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칼'(heqal)의 원형 '칼랄'(qallal)은 어원상 감소하거나 줄어드는 것과(창세8,8) 철저하게 낮춤으로써 능욕하는 것을 의미한다(창세16,4).

 

여기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제3자를 통해 능욕과 굴욕을 안기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제3자란 이사야 예언자 당시와 그 후 시대의 고대 근동의 강자인 아시리아와 이방 열강들을 지칭한다.

 

실제로 즈불룬과 납탈리 땅은 갈릴래아 지방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의 땅으로서 B.C.8세기 말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2열왕15,29).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B.C.732년 경에 아람을 점령하면서 갈릴래아 부근 이스라엘 영토를 침공했으며, 그 땅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가서 노예로 삼았다.

 

이 중의 즈불룬 땅은 갈릴래아 남쪽과 카르멜 산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지명으로서 판관시대 이후로 정치적 중요성이 크지 않았으며 매우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리고 납탈리 땅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서부터 헤르몬 산의 남쪽 경사면을 차지하고 있는 곳으로서 북부 이스라엘의 최북단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국경에 위치하여 외침이 잦았다.


따라서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침략자들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의 나날들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는 ~영화롭게 되리이다'


'앞으로는'에 해당하는 '하아하론'(haaharon)은 천대를 받게 하셨던 사건 후,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지칭한다. 그런데 그 미래에 성취될 일을 묘사하는 동사로 완료형 '히크삐드'(hikbid)가 사용되었다 

 

이 완료형은 '주님께서 ~천대를 받게 하셨으나'로 번역된 '헤칼'(heqal)과 동일한 시제이다.

그러나 이 '히크삐드'(hiqbid)는 과거에 끝난 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로서 미래에 있을 일이지만, 그 성취가 너무나 확실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어날 미래의 일이 때때로 이처럼 예언적 완료로 쓰이는데, 마태오 복음 4장 12~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기간 중의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 전파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히크삐드'의 원형 '카바드'(habad) '무겁다'는 뜻도 지니지만(탈출5,9), 그 육중함에서 느껴지는 영광, 영화를 의미하기도 한다(창세34,19; 탈출14,18).

 

한편 '바다로 가는 길'(해변 길)에 해당하는 '떼레크 하이얌'(derek haiyam)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서쪽 해안 부근의 대로를 가리키는데, 구약 시대에 주변의 나라들과의 무역로 혹은 전쟁의 진격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이민족들의 지역'에 해당하는 '껠릴 학고임'(gellil haggoim)은 '그 여러 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의미인데, 갈릴래아 지역이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아시리아의 민족 혼합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다양한 민족의 혈통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바뀐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바다로 가는 길' '이민족들의 지역'이 여러 민족들의 침공과 유린으로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시리아에 의해 크나큰 침략과 약탈을 당해 고통과 수모와 치욕의 땅으로 전락될 것이지만, 후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주된 무대가 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3주일 복음 (마태 4,12-23)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5~16)

 

마태오 복음 4장 15절의 '즈불룬 땅'에 해당하는 '게 자불론'(ge Zaboulin; land of Zebulun)은 갈릴래아 호수 남서쪽의 지역으로서 즈불룬 지파가 거주하던 땅이며, '납탈리 땅'에 해당하는 '게 네프탈림'(ge Nephthalim; land of Naphtalim)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의 지역으로서납탈리 지파가 거주하던 땅이다.

 

그리고 '바다로 가는 길' '즈불룬과 납탈리 지역에서 해변으로 펼쳐진 곳'이거나 '갈릴래아 해변'을 뜻하며, '요르단 건너편'은 갈릴래아 해안 동쪽 지역을 말한다.

또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팔레스티나 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든 지역들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한마디로 전통적으로 유대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배척되었던 갈릴래아 주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4장 16절의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테이'(skotei; darkness)의 원형 '스코토스'(skotos) '어두움','흑암'으로도 번역되는데, 신적(神的)인 것에 관계된 인간의 의무에 관한 무지,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불신앙과 불경건, 부도덕, 비참한 결과 등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앉아있는'으로번역된 '호 카테메노스'(ho kathemenos; living; which sat)에서 '카테메노스'(kathemenos) '앉다'는 뜻의 동사 '카테마이'(kathemai)의 현재분사형으로서, 현재 계속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율법도 모르고, 불신앙과 불경건으로 하느님의 생명에서 떠나 계속적으로 비참한 운명에 처해 살고 있는 갈릴래아 지역의 주민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백성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지만, 당시 그 지역은 보다 짙은 영적 어두움으로 덮여 있던 곳이기에, 주로 이곳에서 활동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큰 빛'으로 번역된 '포스~메가'(phos~mega; great light)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아 어떤 한정된 구체적인 빛을 의미하지 않고, 진리로서 온 세상을 비추는 메시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4장 16절(ㄴ)의 '고장'으로 번역된 '코라'(chora; the land; the reign) '땅','지역' 또는 '지방'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고장과 그림자가 모두 죽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고장'에 해당하는 '코라'(chora) '그림자'에 해당하는 '스키아'(skia; shadow)가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고, 이 명사구 뒤에 '죽음'을 의미하는 명사 '타나토스'(thanatos; death)의 소유격 '타나투'(thanatou)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글 새 성경은 칠십인역(LXX)을 참고한 것 같은데, 이것은 '죽음의 그늘로 뒤덮여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서, 앞의 '어둠 속에'라는 표현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본문도 역시 하느님의 율법과 은혜도 모르며, 오직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만이 있는 죽음의 땅인 갈릴래아 지역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빛이 떠올랐다'로 번역된 '아네테일렌'(aneteilen; has dawned; is sprung up)의 원형 '아나텔로'(anatello)는 해나 별 따위가 '떠오르다', '일어나다'는 뜻의 동사이다.

 

여기서는 부정 과거 능동형으로 쓰여서 갈릴래아 지역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 위에 떠올라 그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추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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